Wednesday, April 3, 2019

158 이들이 일본의 보물을 만들 것이다

서기 1543년에 세 가지 일이 벌어졌다. 폴란드 신부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했다. 일본은 포르투갈로부터 철포를 수입해 국산화했다. 조선은 성리학 교육기관인 서원(書院)을 설립했다.

이보다 100년 전 조선은 세종 때 조공 폐해 방지를 명분으로 전국 금·은광을 폐쇄했다. 이어 1526년 일본에서 세계 최대 은광 이와미 은산이 발견됐다. 1533년 조선 기술자 2명이 은 제련법인 회취법을 이와미에 전수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은으로 철포를 대량생산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전쟁 직전 왜인이 철포 헌상을 제안했다. 조선 정부는 거부했다.

1641년 일본은 네덜란드에 독점무역권을 허용했다. 일본은 최신 유럽 정보와 학문을 전수받아 '난가쿠(蘭學)'를 발전시켰다. 조선은 쇄국을 유지하며 성리학적 정치, 사회, 경제를 다져 나갔다. 전후 조선통신사들은 일본을 문명을 모르는 오랑캐로 비하했다. 일본은 조선을 성리학과 중국밖에 모르는 오만한 나라라 비난했다. 정조는 성리학 외 학문을 이단으로 통제했다. 통신사들은 에도(江戶)의 부귀영화를 '오랑캐에게 맞지 않은 사치'라고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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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마을인 일본 사가현 아리타(有田)에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끌려간 사기장 이삼평(李參平)을 기리는 신사가 있다. '도잔신사(陶山神社)'다. 신사 정문인 도리이(鳥居)는 청화백자로 만들었다. 이삼평은 1616년 아리타에서 자기 원료인 백자토를 발견해 일본에서 처음으로 백자를 만들었다. 1917년 아리타 주민회는 이삼평을 일본 백자의 도조(陶祖)로 인정하고 신사 위 산꼭대기에 기념비를 세웠다. 훗날 와세다 대학을 세운 사가번 출신 거물 정치가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가 후원했다. 사람들은 이후 그의 일본 이름 '가나가에 산베이(金江三兵衛)'에서 유추해 그를 '이삼평(李參平)'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납치된 도공들은 지역 영주의 엄격한 통제와 풍족한 경제·사회적 지원을 받으며 자기를 생산했다. /박종인 기자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 이삼평(李參平)은 사가번 아리타(有田)에 살다 죽었다. 아리타에는 그를 기리는 신사가 있다. '도잔신사(陶山神社)'다. 신사 정문인 도리이(鳥居)는 청화백자로 만들었다. 아리타는 도자기 마을이다. 신사 주신은 하치만(八幡神)이고 좌우 배신은 이삼평과 임진왜란에 참전한 사가번 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다.

1716년 사가번 무사 야마모토 조초(山本常朝)가 구술한 말을 기록한 책 '하가쿠레(葉隱)'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나오시게가) 일본의 보물을 만들기 위해 유능한 도공 예닐곱을 데려왔다(日本の寶になさるべくと候て燒物上手頭六七人召連れられ候)."('하가쿠레' 3권, 노성환, '일본 사가현 아리타의 조선 도공에 관한 일고찰', 2009) 보물, 그리고 함께 신이 된 납치범과 희생자. 자, 이 모순된 풍경화 감상법이다.

3만8717명의 귀, 산 사람 80명
1598년 10월 말 사쓰마번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부대 귀국선에는 3만8717명의 귀(耳)와 조선인 80여 명이 실려 있었다.('地理纂考·지리찬고', 정광, '일본 소재 한국학자료의 현황과 활용 방안', 2005)

납치된 백성이 흘러넘치자 선조는 "우리 백성은 (명나라) 천자의 적자(天子之赤子)"라며 쇄환을 명했다.(1607년 1월 4일 '선조실록') 귀국한 포로는 5667명에 불과했다.(손승철, '조선통신사의 피로인 쇄환과 그 한계, 2012) 나머지 10만(3만이라고도 하고 8만이라고도 한다) 가운데에는 도공, 조선 사기장들이 있었다.

신(神)이 된 조선의 도공
일본
사가번 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일본의 보물을 만들기 위해' 도공을 끌고 왔다. 보물은 백자(白磁)다. 기술자는 납치했다. 그런데 흙이 없었다. 1300도 고온을 견딜 수 있고, 철분 없는 순백(純白)의 자석(磁石)이 필요했다. 조선인 이삼평이 이즈미야마(泉山)에서 백자토를 발견했다. 나오시게는 가네가에(金江)라는 성을 주고 그를 하녀와 결혼시켰다. 1616년이다.('다쿠가와고문서·多久家古文書', 노성환, '일본 아리타의 조선 도공 이참평에 관한 연구', 2014) 1637년 나베시마 가문은 아리타에 몰려온 일본인 도공 826명을 추방했다. 이삼평은 독점 생산권을 가진 무사가 되었다.('山本神右衛門重澄年譜', 노성환, 2014) 아리타 백자는 인근 이마리(伊萬里)항을 통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사가번은 부자가 됐다.

1828년 아리타는 새로 지은 신사를 '도잔신사(陶山神社)'라 명명하고 이삼평을 주신인 하치만 옆에 모셨다. 이삼평을 끌고 온 나오시게도 함께 모셨다. 1888년 신사 정문인 도리이(鳥居)도 청화백자로 만들어 세웠다. 1917년 아리타 주민들은 신사 위 연화석산(蓮花石山) 정상에 '도조 이삼평 비'를 세웠다.(노성환, 2014) 훗날 와세다대학을 만든 사가번 출신 거물 정치가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가 후원회 명예총재였다. 일본 요업계는 이삼평이 백자토를 발견한 1616년을 일본 백자의 원년(元年)으로 삼고 있다. 비를 세울 때 사람들은 그의 일본명 '가나가에 산베이(金江三兵衛)'에서 유추해 그를'이삼평(李參平)'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조슈번 번주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또한 도공들을 끌고 갔다. 이들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 현 야마구치현 하기(萩)에 정착했다. 원조는 이작광과 이경이다. 이작광은 히로시마에서 활동했고 이경은 하기에 정착해 '하기야키(萩燒)'의 원조가 됐다. 이작광은 분쟁 끝에 살해됐다고 전하고 이경은 사카모토 고라이자에몬(坂本高麗左衛門)이라는 이름과 무사 신분을 받았다. 하기에는 이경, 이작광 외에 다섯 명이 더 활동했다.

가고시마를 지배했던 사쓰마번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는 스물두 성씨 남녀 80여 명을 끌고 와 나에시로가와(苗代川)로 집단 이주시켰다. 현 가고시마 미야마(美山)다. 1614년 조선인 박평의가 백토를 발견했다. 아리타 백토처럼 순백은 아니었지만 이 또한 사쓰마 자기의 원조가 됐다. 이후 나에시로가와 도공들은 무사 신분을 받고 대대로 다양한 종류의 그릇을 구워냈다. 여기까지 '만리타향에서 역경을 딛고 업을 이룬 선조의 혼(魂)'이야기였다. 이제부터 결이 다른 이야기다.

굶어죽은 39명의 도공
종전 20년 뒤 광해군은 지방 관리 박우남이 올린 화준(畵樽·꽃병) 두 개로 국빈 잔치를 치렀다. 둘 다 뚜껑이 없고 하나는 주둥이가 부서져 있었다.(1618년 윤4월 3일 '광해군일기') 값비싼 청화백자는 포기하고 철분이든 석간주 유약을 쓴 철화백자를 만들다가(1634년 5월 18일 '승정원일기') 2년간 백자 생산을 금지하기도 했다.(1637년 윤4월18일 '승정원일기' 등)

숙종 대에 부산 초량왜관에는 대마도가 설립한 전용 가마 '부산요'가 운영 중이었다. 동래부는 해마다 흙과 땔감과 조선 도공을 부산요에 공급했다. 1681년 공급한 백토는 500섬(171t)이었다.('왜인구청등록', 권상인, '왜관요에 관한 소고', 2016) 1707년에는 조선 도공 5명을 순차로 상주시키기도 했다.('館每日記·관매일기', 조국영, '조선 후기 왜관 내 부산요에서 활동했던 양산 도공과 그 역할', 2016) 기술자도 있었고 재료도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 태평성대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도자기 굽는 분원에서 굶어 죽은 자가 39명이나 된다(院下飢死者已至三十九名云)'(1697년 윤3월 6일 '승정원일기') 왜 기술자들이 굶어 죽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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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잔신사가 있는 아리타 연화석산(蓮花石山) 꼭대기 '도조 이삼평비'(왼쪽). 가운데는 18세기 나가사키 데지마를 통해 유럽으로 수출된 아리타 도자기. 알파벳 'A'가 그려져 있다. 오른쪽은 조슈 하기에 끌려간 1대 사카고라이자에몬(坂高麗佐衛門) 이경(李敬)의 작품.
1724년 즉위한 영조는 사치를 금하고 술을 금했다.(1726년 영조실록 2년 10월 13일) 금지령은 재위 내내 실시됐다. 후임 정조는 이렇게 말했다. "농사에 힘쓰고 상업을 억제하여 이익 된 일을 일으키고 해되는 일을 제거한다(務本抑末 興利除害)."(1783년 1월 1일 '정조실록') 분원에서 '기묘하게 기교를 부려 제작한 것들(奇巧制樣)'이 보고되자 정조는 '쓸데없고 긴요하지 않은 것은 일체 만들지 말도록 엄금하라(屬於無用不緊者 一切嚴禁)'고 명했다.(1795년 8월 6일 '정조실록')

돌아오지 않은 도공들
상품은 만들지도 말고 팔지도 말라. 농업만 중시하는 이 '무본억말(務本抑末)'이 오랑캐에게는 500섬씩 흙을 퍼다주고 천민 도공 39명을 굶어죽게 만든 본질적인 이유다. 국내시장은 정책적으로 억제됐다. 천시된 생산은 천민이 맡았다. 아니, 금주령을 내리고 본인은 송절차를 마시고 취한 영조(성대중, '청성잡기')와 '책가도(冊架圖)' 병풍에 청나라와 일본 채색자기를 잔뜩 그려넣은 정조의 위선이 원인인지도 모른다.

천대 속에 아사(餓死)할 것인가, 아니면 무사로서 인생을 향유할 것인가. 하기에 끌려간 도공 이작광은 조선으로 돌아가 동생 이경을 데려갔다.(이작광 4대손 작성 '傳記', 노성환, '일본 하기의 조선도공에 관한 일고찰', 2009) 사쓰마에 끌려갔던 도공 존계(尊階)는 조선으로 돌아가 도공들을 더 데리고 일본으로 갔다.(우관호 등, '아가노, 다카도리 도자기 연구', 2000)

일본 자기의 혁신과 나베시마의 보물
1644년 히가시지마토쿠에몬(東島德右衛門)이라는 아리타 상인이 나가사키에서 중국인 주진관(周辰官)에게 거액을 주고 붉은 염료법 '아카에(赤繪)'를 배웠다. (森淳, '이삼평과 아리타백자의 발전', 1992) 명과 청이 국경을 닫은 사이, 독점 무역권을 가지고 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아리타 자기를 유럽으로 가져갔다. 청나라 청화백자밖에 몰랐던 유럽 부자들이 울긋불긋 화려한 아리타 자기를 대량 주문했다. 끝이 아니었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사가번과 사쓰마번이 자기를 출품했다. 아리타 자기가 박람회 대상을 탔다. 화려하고 큰 일본 자기에 유럽 시장이 활짝 열렸다. 유럽에 자포니즘(japonisme)이 불었다. 이 또한 끝이 아니었다. 사가번은 독일 과학자 고트프리트 바그너를 자기 기술 고문으로 초빙했다. 아리타 자기는 1873년 빈 만국박람회에서도 대상을 수상했다. 사가번은 도예가 3명을 독일로 유학시켰다.(阿久津マリ子, '19세기 후반 이마리요 생산에 유럽이 미친 영향', 2009) 조선은 유럽 시장을 알 턱 없었고, 알려 하지도 않았다.

뿌리는 폭력적으로 끌고 간 조선 도공이 내렸으나, 이후 일본을 자기 명가로 만든 동력은 이 혁신이었다. 일본 다인들이 "흙과 기술은
 조선 것이고 오로지 불만 일본 것(히바카리·ひばかり)"이라며 좋아했던 초기 조선 스타일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끝났는가.

아리타의 역사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대포도 군함도 우리 아리타 자기가 가져다준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불꽃의 마을 아리타의 역사 이야기', 1996) 대포? 군함? "일본의 보물이 되리라"고 한 예언, 아직 끝나지 않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27/2019032700054.html

159 조선 도공의 불씨로 일본은 군함을 만들었다

아편전쟁, 조선 그리고 일본
19세기가 왔다. 정치혁명과 산업혁명과 과학혁명이 유럽 대륙을 휩쓸었다. 전 지구를 무대로 시장 개척 전쟁이 벌어졌다. 유럽 전사(戰士)들이 탄 배는 대량 살상 무기로 무장돼 있었다. 협조적 개방이 불가능하면 언제든 폭력을 쓸 욕망이 충만했다.

그 욕망이 폭발한 사건이 1840년 아편전쟁이었다. 청나라와 무역에서 만성 적자에 시달리던 영국이 인도산 아편을 수출해 적자를 해소하고 청나라 사회를 망가뜨렸다. 이에 청나라 관리 임측서가 국제법에 의거해 아편 2만 상자를 태워버렸다. 이를 핑계로 영국이 대포를 쏴댄 사건이 아편전쟁이었다. 부도덕했다. 하지만 패한 청은 홍콩을 영국에 넘기고 서양 군함 출입을 허용해야 했다.

전쟁 전후 사신으로 간 조선 공무원들이 정보를 수집했다. 주된 정보 소스는 청 정부 관보인 '경보(京報)'였다. '적은 퇴각했으니 국민 여러분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 따위가 끄적여진, 방대하고 치밀하게 조작된 신문이었다. 1845년 음력 3월 28일 귀국한 사신 이정응이 헌종에게 보고했다. "無事矣(무사의, 중국은 아무 일이 없다)."('승정원일기') 때는 일가족에 권력이 집중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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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 일본 중앙정부인 막부가 나가사키에 세운 해군 전습소(가운데 건물들). 네덜란드 교관이 증기선 제작 교습과 해군 훈련을 맡았다. 네덜란드 국기가 있는 쪽은 네덜란드 상관이 있는 인공섬 데지마(出島)다. 1842년 영국에 청나라가 무릎을 꿇는 아편전쟁과 1853년 함포로 무장한 페리의 미 군함을 실감한 뒤 일본은 쇄국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개국과 강병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일본 사가현 혼마루역사관
일본 또한 다방면으로 정보를 수집했다. 전쟁 와중인 1841년 1월 일본 막부 고위 관료 미즈노 다다쿠니(水野忠邦)가 이렇게 말했다. "이국(異國)의 일이라도 곧 우리 경계가 될 일이다." 또다른 관료가 건의했다. "그 옛날 십만 몽골 강병을 물리쳤듯, 포대를 쌓고 실탄을 터뜨려야 한다." 무사안일과 경계의 갈림길. 1543년 철포(鐵砲)와 성리학을 선택했던 두 나라가 300년 뒤 또 상이한 선택을 하고 만 것이다.

나가사키와 막부의 정보력
일본은 에도(江戶·현 도쿄)에 있는 막부 중앙 정부와 각 번 정부로 나뉘어 있었다. 각 번은 외교권 외에는 권한이 넓었다. 나가사키는 막부 직할지였다. 나가사키 인공섬 데지마(出島)에는 네덜란드 상관이 있었다. 나가사키는 유럽 학문 난가쿠(蘭學)의 성지였다.

1808년 영국 군함이 앙숙지간인 네덜란드 상선을 추적해 나가사키까지 왔다. 영국 배는 데지마를 포격하고 도주했다. '페이튼호 사건'이다. 막부는 나가사키 통역관들에게 영어 학습을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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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12월 5일 자 프랑스 르몽드 일러스트. 1863년 일본 가고시마를 포격하는 영국군함들 삽화다. '사쓰에이(薩英) 전쟁'이라 부르는 포격전 끝에 가고시마는 불바다가 됐고, 사쓰마번은 부국강병을 택했다. /디킨슨대학 House Divided Project
네덜란드 상인들은 정기적으로 막부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화란풍설서(和蘭風說書)'라는 이 보고서에는 싱가포르의 유럽 신문을 정리한 세계 정세가 적혀 있었다. 청나라 상인들도 당풍설서(唐風說書) 제출이 의무였다. 아편전쟁이 터지자 막부는 풍설서를 종합한 끝에 1842년 외국 배는 '두 번 생각 않고(無二念) 격침한다'는 '무이념 타격령'을 '조난당한 선박은 연료와 물을 보급한다'는 신수급여령(薪水給與令)으로 낮췄다. 개방의 준비가 시작되고 있었다.

히젠의 요괴 나베시마 나오마사
1830년 열일곱 먹은 나베시마 나오마사(鍋島直正)가 사가번(佐賀藩) 10대 번주에 취임했다. 아버지 나리나오(齊直)는 사치가 낳은 가난과 태풍이 휩쓸고 간 쑥대밭을 아들에게 물려줬다. 취임 당일부터 빚쟁이에 시달린 나오마사는 첫 방문지로 나가사키를 택했다. 그때 사가번은 나가사키 경비를 맡고 있었다. 난가쿠에 미쳐 '난벽(蘭癖) 영주'로 불리는 나오마사는 그 길로 네덜란드 상선에 올라 샅샅이 구경을 하고 사가로 돌아갔다.

먼저 마을 전체가 태풍과 화재로 사라져버린 아리타(有田)에 세금을 면제하고 흩어져버린 도공들을 불러모았다. 번의 특산물 감독기관인 국산방(國産方)을 확대해 도자기 품질 관리를 실시했다. 태풍 피해가 복구될 때까지 소작료도 3분의 1로 인하하는 개혁도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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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서 퇴각하는 프랑스 군대.
아편전쟁이 터졌다. 나오마사는 서양 총포술을 도입했다. 1844년 네덜란드 군함 팔렘방호가 나가사키에 기항했다. 나오마사는 관리들과 함께 배에 올라 시설을 견학했다. 이 배에는 네덜란드 국왕이 보낸 국서가 실려 있었다. 국서에는 '조만간 미국 군함이 가서 통상을 요구하면 응하는 게 이롭다'고 적혀 있었다. 네덜란드는 미국 측이 요청했던 사전고지를 전달했을 뿐이다. 나오마사는 무기연구소인 화술방(火術方)을 설치해 무기 연구 개발과 훈련에 착수했다. 1849년 나오마사는 맏아들에게 우두를 맞혔다. 천연두 세균이 번주 아들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근대 종두법이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850년 근대 용광로인 반사로(反射爐) 제작에 들어갔다. 연료의 열을 천장으로 반사시켜 반대편 철을 녹이는 용광로다. 연료 찌꺼기에 오염되지 않는 고품질 철을 얻을 수 있는 첨단기술이었다. 무기 제작에 필수다. 설계는 네덜란드 장교 휴게닌이 쓴 책 '루이크 왕립철제대포주조소의 주조법'을 참고로, 시공은 아리타의 전통기술을 적용했다. 1300도가 넘는 고열을 만드는 자기 가마 기술이다.

1851년 번립 난가쿠 교육기관인 난가쿠료(蘭學寮)를 설치했다. 유학 교육기관인 고도칸(弘道館) 학생들이 대거 자퇴하고 난가쿠료로 전학했다. 1852년 이화학연구소인 정련방(精鍊方)을 세웠다. 증기기관과 사진과 유리와 화약과 전신기 같은 다방면 연구소다. 그 해 반사로가 완공되고 철제 대포를 쏟아냈다. 대포는 나가사키항에 배치됐다. 막부는 사가번에 철제 대포 50문을 주문했다. 1853년 페리 제독이 몰고 온 미국 군함이 에도 앞바다에서 포격을 하고 돌아갔다. 일본인들은 "흑선(黑船)이 왔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각 번에 반사로 제작 붐이 불었다.
1917년 일본 아리타(有田)가 세운 도조 이삼 평비 뒷면.
1917년 일본 아리타(有田)가 세운 도조 이삼 평비 뒷면. '大恩人(대은인)'이라고 적혀 있다. 임진왜란 때 납치한 조선 도공의 기술력은 훗날 일본의 부국강병 씨앗이 됐다.
그사이 나오마사는 네덜란드로부터 군함을 주문하고 정련방에서 완성한 증기기관으로 일본제 증기선을 만들었다. 1855년 네덜란드 군함 게데이호가 입항했다. 나오마사는 "상선을 줄 테니 이 군함을 팔라"고 우겨 함장을 곤혹스럽게 했다. 정치도 안중에 없고 오로지 부국과 강병에 미친 듯이 매달리는 나오마사를, 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히젠(肥前·사가의 옛 이름)의 요괴'라 불렀다. 대포, 증기기관 따위 근대 문물 개발에 열중할 뿐 정치색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그가 1852년 반사로 제작에 성공했을 때, 다섯 살 많은 이웃 사쓰마번(薩摩藩) 번주가 이렇게 말했다. "서양인도 사람이고 사가 사람도 사람이고 사쓰마 사람도 똑같이 사람이다. 연구하라."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齊彬). 역시 '난벽(蘭癖) 영주'라 불렸던 개명된 지도자였다.

난벽 영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개혁
1851년 11대 번주가 된 나리아키라는 바로 그해 집성관(集成館)을 설치했다. 옷감부터 사진, 유리, 조선과 대포까지 만드는 근대 공업단지다.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마 도시미치, 고다이 도모아쓰 같은 하급무사들도 똑똑하고 비전 있는 사람이라면 끌어 모았다. 나리아키라는 1854년 대포 16문이 달린 370t짜리 군함을 완공해 막부에 헌납했다. 미국과 수호조약을 맺고 문호를 개방한 바로 그해다.

1857년 집성관에서도 반사로 제작에 성공했다. 역시 근대식 설계와 사쓰마 도자기 가마의 내열 기술이 응용됐다. 1858년 사가번주이자 친구 나오마사가 국산 증기선을 타고 나리아키라를 극비 방문했다. 대화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나리아키라는 이 회동 두 달 뒤 죽었다. 이복동생 히사미쓰(久光)가 개혁을 승계했다.

1863년 영국 함대가 가고시마항을 포격했다. 1년 전 벌어진 영국인 살해사건 복수극이었다. 사쓰마는 포격으로 맞섰지만 집성관이 전소되고 가고시마 시가지가 불탔다. '사쓰에이(薩英) 전쟁'이라 한다. 영국도 사쓰마도 서로의 힘에 놀랐다. 양측은 평화협정을 맺었다.

적에게 배운다
1858년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으며 막부는 조약에 '군함 및 무기 구입과 교관 초빙' 조항을 삽입했다. 또 네덜란드와 근대 조약을 맺으며 데지마 시절 간첩 혐의로 쫓아냈던 학자 지볼트를 외교 고문으로 초빙했다. 1855년 막부는 데지마 옆에 훈련소 겸 군함 제작소인 해군전습소를 설치했다. 각 번 인재들이 네덜란드 교관으로부터 근대 무기와 병술을 배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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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 제독이 일본에 오기 1년 전인 1852년 사가번은 이미 철제 대포를 만들었다(왼쪽·사가현 혼마루역사관). 1866년 병인양요 직후 조선은 강화도 덕진진에 '외국 선박 항해 금지'를 선언한 척화비를 세웠다(가운데). 5년 뒤 신미양요 때 덕진진은 미 해군에 의해 쑥대밭이 됐다. 오른쪽은 신미양요 때 미 군함에 오른 조선 관리들(폴게티박물관).
1860년 막부는 바로 그 미국과 유럽으로 견학단을 보냈다. 사쓰에이 전쟁에서 영국의 힘을 경험한 사쓰마는 2년 뒤 무사급 3명과 통역관 1명, 유학생 15명을 영국으로 보냈다. 이들의 동상이 가고시마역 앞에 서 있다. 가고시마시는 이름을 '젊은 가고시마의 군상(群像)'이라 지었다. 유학생을 이끌었던 하급 무사 고다이 도모아쓰는 런던에서 방적기와 소총 3000정을 구입했다. 집성관은 재건돼 영국 기술이 총집결했다. 적의 힘을 경험하고 바로 그 적에게 기술을 배운 것이다. 그렇다면 돈은 어디에서 나왔나.

각성과 준비의 힘, 도자기
1867년 파리박람회가 열렸다. 사가번과 사쓰마번이 도자기를 출품했다. 사가번 아리타 도자기는 일본 열풍을 일으킬 정도로 인기였다. 아리타초사(有田町史)에는 박람회가 종료되고 11월 29일 박람회 대표단 통역가 고이데 센노스케(小出千之助)가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귀국편 화물은 철포(鐵砲)를 본체로 하고 나사 등이며 여기에 따로 구입한 물품을 더해서 다음 달 나가사키로 가는 배에 싣고 갈 예정입니다.' 아리타초사를 쓴 사가 미야타 고타로(宮田幸太郞)는 "막부 마지막 15년간 아리타 도자기 무역 자료는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인멸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자기로 국내외에서 번 돈이 저 거대한 군수산업 운용에 투입됐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가현 혼마루역사관 마당에는 나베시마 나오마사가 만든 철제 대포가 서 있다. 전시실에는 근대 과학기술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나오마사가 부활시킨 도자기마을 아리타 산꼭대기에는 도조(陶祖) 이삼평 기념비가 서 있다. 글씨를 쓴 사람은 나베시마 나오미쓰(鍋島直映)다. "일본의 보물을 만든다"며 이삼평을 납치해간 나오시게(直茂)의 후손이다. 뒷면에는 찬사가 가득하다. 세 글자가 눈에 띈다. '대은인(大恩人)'. 그냥 은인이 아니라 '대은인'이다. 서양 그 어느 국가도 이후 일본을 침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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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프랑스군의 병인양요를 치르고 조선은 강화도 덕진진에 외국 선박 항해 금지 선언비를 세웠다. 1871년 페리 제독의 외손자 로저스가 이끄는 미국 함대가 조선 강화도 염하(鹽河)에 진입했다. 조선 수군이 김포와 강화 양안에서 선제 포격을 퍼부었다. 조선 수군은 전멸했다. 각성과 준비와 실천의 부재가 만든 전사들의 장엄한 죽음이었다.


〈주요 참고 자료〉

1. 논문: '일본 사가현 아리타의 조선 도공에 관한 일고찰'(허성환)'일본의 군사 기록에 대한 고찰'(박
지영) '아편전쟁과 조선, 일본'(하정식) '동아시아의 개항: 난징조약에서 강화도조약까지'(강진아) '19世紀後半の伊萬里燒生産におけるヨ―ロッパの影響'(阿久津マリ子) '近代における有田陶業技術の變遷'(鈴田由紀夫)

2. 단행본: '有田町史-陶業編1'(有田町) '조선을 탐한 사무라이'(이광훈) '메이지유신이 조선에 묻다'(조용준) '明治日本の産業革命遺産'(岡田晃)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03/201904030007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