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pril 3, 2019

158 이들이 일본의 보물을 만들 것이다

서기 1543년에 세 가지 일이 벌어졌다. 폴란드 신부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했다. 일본은 포르투갈로부터 철포를 수입해 국산화했다. 조선은 성리학 교육기관인 서원(書院)을 설립했다.

이보다 100년 전 조선은 세종 때 조공 폐해 방지를 명분으로 전국 금·은광을 폐쇄했다. 이어 1526년 일본에서 세계 최대 은광 이와미 은산이 발견됐다. 1533년 조선 기술자 2명이 은 제련법인 회취법을 이와미에 전수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은으로 철포를 대량생산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전쟁 직전 왜인이 철포 헌상을 제안했다. 조선 정부는 거부했다.

1641년 일본은 네덜란드에 독점무역권을 허용했다. 일본은 최신 유럽 정보와 학문을 전수받아 '난가쿠(蘭學)'를 발전시켰다. 조선은 쇄국을 유지하며 성리학적 정치, 사회, 경제를 다져 나갔다. 전후 조선통신사들은 일본을 문명을 모르는 오랑캐로 비하했다. 일본은 조선을 성리학과 중국밖에 모르는 오만한 나라라 비난했다. 정조는 성리학 외 학문을 이단으로 통제했다. 통신사들은 에도(江戶)의 부귀영화를 '오랑캐에게 맞지 않은 사치'라고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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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마을인 일본 사가현 아리타(有田)에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끌려간 사기장 이삼평(李參平)을 기리는 신사가 있다. '도잔신사(陶山神社)'다. 신사 정문인 도리이(鳥居)는 청화백자로 만들었다. 이삼평은 1616년 아리타에서 자기 원료인 백자토를 발견해 일본에서 처음으로 백자를 만들었다. 1917년 아리타 주민회는 이삼평을 일본 백자의 도조(陶祖)로 인정하고 신사 위 산꼭대기에 기념비를 세웠다. 훗날 와세다 대학을 세운 사가번 출신 거물 정치가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가 후원했다. 사람들은 이후 그의 일본 이름 '가나가에 산베이(金江三兵衛)'에서 유추해 그를 '이삼평(李參平)'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납치된 도공들은 지역 영주의 엄격한 통제와 풍족한 경제·사회적 지원을 받으며 자기를 생산했다. /박종인 기자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 이삼평(李參平)은 사가번 아리타(有田)에 살다 죽었다. 아리타에는 그를 기리는 신사가 있다. '도잔신사(陶山神社)'다. 신사 정문인 도리이(鳥居)는 청화백자로 만들었다. 아리타는 도자기 마을이다. 신사 주신은 하치만(八幡神)이고 좌우 배신은 이삼평과 임진왜란에 참전한 사가번 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다.

1716년 사가번 무사 야마모토 조초(山本常朝)가 구술한 말을 기록한 책 '하가쿠레(葉隱)'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나오시게가) 일본의 보물을 만들기 위해 유능한 도공 예닐곱을 데려왔다(日本の寶になさるべくと候て燒物上手頭六七人召連れられ候)."('하가쿠레' 3권, 노성환, '일본 사가현 아리타의 조선 도공에 관한 일고찰', 2009) 보물, 그리고 함께 신이 된 납치범과 희생자. 자, 이 모순된 풍경화 감상법이다.

3만8717명의 귀, 산 사람 80명
1598년 10월 말 사쓰마번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부대 귀국선에는 3만8717명의 귀(耳)와 조선인 80여 명이 실려 있었다.('地理纂考·지리찬고', 정광, '일본 소재 한국학자료의 현황과 활용 방안', 2005)

납치된 백성이 흘러넘치자 선조는 "우리 백성은 (명나라) 천자의 적자(天子之赤子)"라며 쇄환을 명했다.(1607년 1월 4일 '선조실록') 귀국한 포로는 5667명에 불과했다.(손승철, '조선통신사의 피로인 쇄환과 그 한계, 2012) 나머지 10만(3만이라고도 하고 8만이라고도 한다) 가운데에는 도공, 조선 사기장들이 있었다.

신(神)이 된 조선의 도공
일본
사가번 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일본의 보물을 만들기 위해' 도공을 끌고 왔다. 보물은 백자(白磁)다. 기술자는 납치했다. 그런데 흙이 없었다. 1300도 고온을 견딜 수 있고, 철분 없는 순백(純白)의 자석(磁石)이 필요했다. 조선인 이삼평이 이즈미야마(泉山)에서 백자토를 발견했다. 나오시게는 가네가에(金江)라는 성을 주고 그를 하녀와 결혼시켰다. 1616년이다.('다쿠가와고문서·多久家古文書', 노성환, '일본 아리타의 조선 도공 이참평에 관한 연구', 2014) 1637년 나베시마 가문은 아리타에 몰려온 일본인 도공 826명을 추방했다. 이삼평은 독점 생산권을 가진 무사가 되었다.('山本神右衛門重澄年譜', 노성환, 2014) 아리타 백자는 인근 이마리(伊萬里)항을 통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사가번은 부자가 됐다.

1828년 아리타는 새로 지은 신사를 '도잔신사(陶山神社)'라 명명하고 이삼평을 주신인 하치만 옆에 모셨다. 이삼평을 끌고 온 나오시게도 함께 모셨다. 1888년 신사 정문인 도리이(鳥居)도 청화백자로 만들어 세웠다. 1917년 아리타 주민들은 신사 위 연화석산(蓮花石山) 정상에 '도조 이삼평 비'를 세웠다.(노성환, 2014) 훗날 와세다대학을 만든 사가번 출신 거물 정치가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가 후원회 명예총재였다. 일본 요업계는 이삼평이 백자토를 발견한 1616년을 일본 백자의 원년(元年)으로 삼고 있다. 비를 세울 때 사람들은 그의 일본명 '가나가에 산베이(金江三兵衛)'에서 유추해 그를'이삼평(李參平)'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조슈번 번주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또한 도공들을 끌고 갔다. 이들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 현 야마구치현 하기(萩)에 정착했다. 원조는 이작광과 이경이다. 이작광은 히로시마에서 활동했고 이경은 하기에 정착해 '하기야키(萩燒)'의 원조가 됐다. 이작광은 분쟁 끝에 살해됐다고 전하고 이경은 사카모토 고라이자에몬(坂本高麗左衛門)이라는 이름과 무사 신분을 받았다. 하기에는 이경, 이작광 외에 다섯 명이 더 활동했다.

가고시마를 지배했던 사쓰마번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는 스물두 성씨 남녀 80여 명을 끌고 와 나에시로가와(苗代川)로 집단 이주시켰다. 현 가고시마 미야마(美山)다. 1614년 조선인 박평의가 백토를 발견했다. 아리타 백토처럼 순백은 아니었지만 이 또한 사쓰마 자기의 원조가 됐다. 이후 나에시로가와 도공들은 무사 신분을 받고 대대로 다양한 종류의 그릇을 구워냈다. 여기까지 '만리타향에서 역경을 딛고 업을 이룬 선조의 혼(魂)'이야기였다. 이제부터 결이 다른 이야기다.

굶어죽은 39명의 도공
종전 20년 뒤 광해군은 지방 관리 박우남이 올린 화준(畵樽·꽃병) 두 개로 국빈 잔치를 치렀다. 둘 다 뚜껑이 없고 하나는 주둥이가 부서져 있었다.(1618년 윤4월 3일 '광해군일기') 값비싼 청화백자는 포기하고 철분이든 석간주 유약을 쓴 철화백자를 만들다가(1634년 5월 18일 '승정원일기') 2년간 백자 생산을 금지하기도 했다.(1637년 윤4월18일 '승정원일기' 등)

숙종 대에 부산 초량왜관에는 대마도가 설립한 전용 가마 '부산요'가 운영 중이었다. 동래부는 해마다 흙과 땔감과 조선 도공을 부산요에 공급했다. 1681년 공급한 백토는 500섬(171t)이었다.('왜인구청등록', 권상인, '왜관요에 관한 소고', 2016) 1707년에는 조선 도공 5명을 순차로 상주시키기도 했다.('館每日記·관매일기', 조국영, '조선 후기 왜관 내 부산요에서 활동했던 양산 도공과 그 역할', 2016) 기술자도 있었고 재료도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 태평성대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도자기 굽는 분원에서 굶어 죽은 자가 39명이나 된다(院下飢死者已至三十九名云)'(1697년 윤3월 6일 '승정원일기') 왜 기술자들이 굶어 죽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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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잔신사가 있는 아리타 연화석산(蓮花石山) 꼭대기 '도조 이삼평비'(왼쪽). 가운데는 18세기 나가사키 데지마를 통해 유럽으로 수출된 아리타 도자기. 알파벳 'A'가 그려져 있다. 오른쪽은 조슈 하기에 끌려간 1대 사카고라이자에몬(坂高麗佐衛門) 이경(李敬)의 작품.
1724년 즉위한 영조는 사치를 금하고 술을 금했다.(1726년 영조실록 2년 10월 13일) 금지령은 재위 내내 실시됐다. 후임 정조는 이렇게 말했다. "농사에 힘쓰고 상업을 억제하여 이익 된 일을 일으키고 해되는 일을 제거한다(務本抑末 興利除害)."(1783년 1월 1일 '정조실록') 분원에서 '기묘하게 기교를 부려 제작한 것들(奇巧制樣)'이 보고되자 정조는 '쓸데없고 긴요하지 않은 것은 일체 만들지 말도록 엄금하라(屬於無用不緊者 一切嚴禁)'고 명했다.(1795년 8월 6일 '정조실록')

돌아오지 않은 도공들
상품은 만들지도 말고 팔지도 말라. 농업만 중시하는 이 '무본억말(務本抑末)'이 오랑캐에게는 500섬씩 흙을 퍼다주고 천민 도공 39명을 굶어죽게 만든 본질적인 이유다. 국내시장은 정책적으로 억제됐다. 천시된 생산은 천민이 맡았다. 아니, 금주령을 내리고 본인은 송절차를 마시고 취한 영조(성대중, '청성잡기')와 '책가도(冊架圖)' 병풍에 청나라와 일본 채색자기를 잔뜩 그려넣은 정조의 위선이 원인인지도 모른다.

천대 속에 아사(餓死)할 것인가, 아니면 무사로서 인생을 향유할 것인가. 하기에 끌려간 도공 이작광은 조선으로 돌아가 동생 이경을 데려갔다.(이작광 4대손 작성 '傳記', 노성환, '일본 하기의 조선도공에 관한 일고찰', 2009) 사쓰마에 끌려갔던 도공 존계(尊階)는 조선으로 돌아가 도공들을 더 데리고 일본으로 갔다.(우관호 등, '아가노, 다카도리 도자기 연구', 2000)

일본 자기의 혁신과 나베시마의 보물
1644년 히가시지마토쿠에몬(東島德右衛門)이라는 아리타 상인이 나가사키에서 중국인 주진관(周辰官)에게 거액을 주고 붉은 염료법 '아카에(赤繪)'를 배웠다. (森淳, '이삼평과 아리타백자의 발전', 1992) 명과 청이 국경을 닫은 사이, 독점 무역권을 가지고 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아리타 자기를 유럽으로 가져갔다. 청나라 청화백자밖에 몰랐던 유럽 부자들이 울긋불긋 화려한 아리타 자기를 대량 주문했다. 끝이 아니었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사가번과 사쓰마번이 자기를 출품했다. 아리타 자기가 박람회 대상을 탔다. 화려하고 큰 일본 자기에 유럽 시장이 활짝 열렸다. 유럽에 자포니즘(japonisme)이 불었다. 이 또한 끝이 아니었다. 사가번은 독일 과학자 고트프리트 바그너를 자기 기술 고문으로 초빙했다. 아리타 자기는 1873년 빈 만국박람회에서도 대상을 수상했다. 사가번은 도예가 3명을 독일로 유학시켰다.(阿久津マリ子, '19세기 후반 이마리요 생산에 유럽이 미친 영향', 2009) 조선은 유럽 시장을 알 턱 없었고, 알려 하지도 않았다.

뿌리는 폭력적으로 끌고 간 조선 도공이 내렸으나, 이후 일본을 자기 명가로 만든 동력은 이 혁신이었다. 일본 다인들이 "흙과 기술은
 조선 것이고 오로지 불만 일본 것(히바카리·ひばかり)"이라며 좋아했던 초기 조선 스타일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끝났는가.

아리타의 역사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대포도 군함도 우리 아리타 자기가 가져다준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불꽃의 마을 아리타의 역사 이야기', 1996) 대포? 군함? "일본의 보물이 되리라"고 한 예언, 아직 끝나지 않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27/2019032700054.html

159 조선 도공의 불씨로 일본은 군함을 만들었다

아편전쟁, 조선 그리고 일본
19세기가 왔다. 정치혁명과 산업혁명과 과학혁명이 유럽 대륙을 휩쓸었다. 전 지구를 무대로 시장 개척 전쟁이 벌어졌다. 유럽 전사(戰士)들이 탄 배는 대량 살상 무기로 무장돼 있었다. 협조적 개방이 불가능하면 언제든 폭력을 쓸 욕망이 충만했다.

그 욕망이 폭발한 사건이 1840년 아편전쟁이었다. 청나라와 무역에서 만성 적자에 시달리던 영국이 인도산 아편을 수출해 적자를 해소하고 청나라 사회를 망가뜨렸다. 이에 청나라 관리 임측서가 국제법에 의거해 아편 2만 상자를 태워버렸다. 이를 핑계로 영국이 대포를 쏴댄 사건이 아편전쟁이었다. 부도덕했다. 하지만 패한 청은 홍콩을 영국에 넘기고 서양 군함 출입을 허용해야 했다.

전쟁 전후 사신으로 간 조선 공무원들이 정보를 수집했다. 주된 정보 소스는 청 정부 관보인 '경보(京報)'였다. '적은 퇴각했으니 국민 여러분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 따위가 끄적여진, 방대하고 치밀하게 조작된 신문이었다. 1845년 음력 3월 28일 귀국한 사신 이정응이 헌종에게 보고했다. "無事矣(무사의, 중국은 아무 일이 없다)."('승정원일기') 때는 일가족에 권력이 집중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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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 일본 중앙정부인 막부가 나가사키에 세운 해군 전습소(가운데 건물들). 네덜란드 교관이 증기선 제작 교습과 해군 훈련을 맡았다. 네덜란드 국기가 있는 쪽은 네덜란드 상관이 있는 인공섬 데지마(出島)다. 1842년 영국에 청나라가 무릎을 꿇는 아편전쟁과 1853년 함포로 무장한 페리의 미 군함을 실감한 뒤 일본은 쇄국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개국과 강병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일본 사가현 혼마루역사관
일본 또한 다방면으로 정보를 수집했다. 전쟁 와중인 1841년 1월 일본 막부 고위 관료 미즈노 다다쿠니(水野忠邦)가 이렇게 말했다. "이국(異國)의 일이라도 곧 우리 경계가 될 일이다." 또다른 관료가 건의했다. "그 옛날 십만 몽골 강병을 물리쳤듯, 포대를 쌓고 실탄을 터뜨려야 한다." 무사안일과 경계의 갈림길. 1543년 철포(鐵砲)와 성리학을 선택했던 두 나라가 300년 뒤 또 상이한 선택을 하고 만 것이다.

나가사키와 막부의 정보력
일본은 에도(江戶·현 도쿄)에 있는 막부 중앙 정부와 각 번 정부로 나뉘어 있었다. 각 번은 외교권 외에는 권한이 넓었다. 나가사키는 막부 직할지였다. 나가사키 인공섬 데지마(出島)에는 네덜란드 상관이 있었다. 나가사키는 유럽 학문 난가쿠(蘭學)의 성지였다.

1808년 영국 군함이 앙숙지간인 네덜란드 상선을 추적해 나가사키까지 왔다. 영국 배는 데지마를 포격하고 도주했다. '페이튼호 사건'이다. 막부는 나가사키 통역관들에게 영어 학습을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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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12월 5일 자 프랑스 르몽드 일러스트. 1863년 일본 가고시마를 포격하는 영국군함들 삽화다. '사쓰에이(薩英) 전쟁'이라 부르는 포격전 끝에 가고시마는 불바다가 됐고, 사쓰마번은 부국강병을 택했다. /디킨슨대학 House Divided Project
네덜란드 상인들은 정기적으로 막부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화란풍설서(和蘭風說書)'라는 이 보고서에는 싱가포르의 유럽 신문을 정리한 세계 정세가 적혀 있었다. 청나라 상인들도 당풍설서(唐風說書) 제출이 의무였다. 아편전쟁이 터지자 막부는 풍설서를 종합한 끝에 1842년 외국 배는 '두 번 생각 않고(無二念) 격침한다'는 '무이념 타격령'을 '조난당한 선박은 연료와 물을 보급한다'는 신수급여령(薪水給與令)으로 낮췄다. 개방의 준비가 시작되고 있었다.

히젠의 요괴 나베시마 나오마사
1830년 열일곱 먹은 나베시마 나오마사(鍋島直正)가 사가번(佐賀藩) 10대 번주에 취임했다. 아버지 나리나오(齊直)는 사치가 낳은 가난과 태풍이 휩쓸고 간 쑥대밭을 아들에게 물려줬다. 취임 당일부터 빚쟁이에 시달린 나오마사는 첫 방문지로 나가사키를 택했다. 그때 사가번은 나가사키 경비를 맡고 있었다. 난가쿠에 미쳐 '난벽(蘭癖) 영주'로 불리는 나오마사는 그 길로 네덜란드 상선에 올라 샅샅이 구경을 하고 사가로 돌아갔다.

먼저 마을 전체가 태풍과 화재로 사라져버린 아리타(有田)에 세금을 면제하고 흩어져버린 도공들을 불러모았다. 번의 특산물 감독기관인 국산방(國産方)을 확대해 도자기 품질 관리를 실시했다. 태풍 피해가 복구될 때까지 소작료도 3분의 1로 인하하는 개혁도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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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서 퇴각하는 프랑스 군대.
아편전쟁이 터졌다. 나오마사는 서양 총포술을 도입했다. 1844년 네덜란드 군함 팔렘방호가 나가사키에 기항했다. 나오마사는 관리들과 함께 배에 올라 시설을 견학했다. 이 배에는 네덜란드 국왕이 보낸 국서가 실려 있었다. 국서에는 '조만간 미국 군함이 가서 통상을 요구하면 응하는 게 이롭다'고 적혀 있었다. 네덜란드는 미국 측이 요청했던 사전고지를 전달했을 뿐이다. 나오마사는 무기연구소인 화술방(火術方)을 설치해 무기 연구 개발과 훈련에 착수했다. 1849년 나오마사는 맏아들에게 우두를 맞혔다. 천연두 세균이 번주 아들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근대 종두법이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850년 근대 용광로인 반사로(反射爐) 제작에 들어갔다. 연료의 열을 천장으로 반사시켜 반대편 철을 녹이는 용광로다. 연료 찌꺼기에 오염되지 않는 고품질 철을 얻을 수 있는 첨단기술이었다. 무기 제작에 필수다. 설계는 네덜란드 장교 휴게닌이 쓴 책 '루이크 왕립철제대포주조소의 주조법'을 참고로, 시공은 아리타의 전통기술을 적용했다. 1300도가 넘는 고열을 만드는 자기 가마 기술이다.

1851년 번립 난가쿠 교육기관인 난가쿠료(蘭學寮)를 설치했다. 유학 교육기관인 고도칸(弘道館) 학생들이 대거 자퇴하고 난가쿠료로 전학했다. 1852년 이화학연구소인 정련방(精鍊方)을 세웠다. 증기기관과 사진과 유리와 화약과 전신기 같은 다방면 연구소다. 그 해 반사로가 완공되고 철제 대포를 쏟아냈다. 대포는 나가사키항에 배치됐다. 막부는 사가번에 철제 대포 50문을 주문했다. 1853년 페리 제독이 몰고 온 미국 군함이 에도 앞바다에서 포격을 하고 돌아갔다. 일본인들은 "흑선(黑船)이 왔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각 번에 반사로 제작 붐이 불었다.
1917년 일본 아리타(有田)가 세운 도조 이삼 평비 뒷면.
1917년 일본 아리타(有田)가 세운 도조 이삼 평비 뒷면. '大恩人(대은인)'이라고 적혀 있다. 임진왜란 때 납치한 조선 도공의 기술력은 훗날 일본의 부국강병 씨앗이 됐다.
그사이 나오마사는 네덜란드로부터 군함을 주문하고 정련방에서 완성한 증기기관으로 일본제 증기선을 만들었다. 1855년 네덜란드 군함 게데이호가 입항했다. 나오마사는 "상선을 줄 테니 이 군함을 팔라"고 우겨 함장을 곤혹스럽게 했다. 정치도 안중에 없고 오로지 부국과 강병에 미친 듯이 매달리는 나오마사를, 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히젠(肥前·사가의 옛 이름)의 요괴'라 불렀다. 대포, 증기기관 따위 근대 문물 개발에 열중할 뿐 정치색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그가 1852년 반사로 제작에 성공했을 때, 다섯 살 많은 이웃 사쓰마번(薩摩藩) 번주가 이렇게 말했다. "서양인도 사람이고 사가 사람도 사람이고 사쓰마 사람도 똑같이 사람이다. 연구하라."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齊彬). 역시 '난벽(蘭癖) 영주'라 불렸던 개명된 지도자였다.

난벽 영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개혁
1851년 11대 번주가 된 나리아키라는 바로 그해 집성관(集成館)을 설치했다. 옷감부터 사진, 유리, 조선과 대포까지 만드는 근대 공업단지다.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마 도시미치, 고다이 도모아쓰 같은 하급무사들도 똑똑하고 비전 있는 사람이라면 끌어 모았다. 나리아키라는 1854년 대포 16문이 달린 370t짜리 군함을 완공해 막부에 헌납했다. 미국과 수호조약을 맺고 문호를 개방한 바로 그해다.

1857년 집성관에서도 반사로 제작에 성공했다. 역시 근대식 설계와 사쓰마 도자기 가마의 내열 기술이 응용됐다. 1858년 사가번주이자 친구 나오마사가 국산 증기선을 타고 나리아키라를 극비 방문했다. 대화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나리아키라는 이 회동 두 달 뒤 죽었다. 이복동생 히사미쓰(久光)가 개혁을 승계했다.

1863년 영국 함대가 가고시마항을 포격했다. 1년 전 벌어진 영국인 살해사건 복수극이었다. 사쓰마는 포격으로 맞섰지만 집성관이 전소되고 가고시마 시가지가 불탔다. '사쓰에이(薩英) 전쟁'이라 한다. 영국도 사쓰마도 서로의 힘에 놀랐다. 양측은 평화협정을 맺었다.

적에게 배운다
1858년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으며 막부는 조약에 '군함 및 무기 구입과 교관 초빙' 조항을 삽입했다. 또 네덜란드와 근대 조약을 맺으며 데지마 시절 간첩 혐의로 쫓아냈던 학자 지볼트를 외교 고문으로 초빙했다. 1855년 막부는 데지마 옆에 훈련소 겸 군함 제작소인 해군전습소를 설치했다. 각 번 인재들이 네덜란드 교관으로부터 근대 무기와 병술을 배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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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 제독이 일본에 오기 1년 전인 1852년 사가번은 이미 철제 대포를 만들었다(왼쪽·사가현 혼마루역사관). 1866년 병인양요 직후 조선은 강화도 덕진진에 '외국 선박 항해 금지'를 선언한 척화비를 세웠다(가운데). 5년 뒤 신미양요 때 덕진진은 미 해군에 의해 쑥대밭이 됐다. 오른쪽은 신미양요 때 미 군함에 오른 조선 관리들(폴게티박물관).
1860년 막부는 바로 그 미국과 유럽으로 견학단을 보냈다. 사쓰에이 전쟁에서 영국의 힘을 경험한 사쓰마는 2년 뒤 무사급 3명과 통역관 1명, 유학생 15명을 영국으로 보냈다. 이들의 동상이 가고시마역 앞에 서 있다. 가고시마시는 이름을 '젊은 가고시마의 군상(群像)'이라 지었다. 유학생을 이끌었던 하급 무사 고다이 도모아쓰는 런던에서 방적기와 소총 3000정을 구입했다. 집성관은 재건돼 영국 기술이 총집결했다. 적의 힘을 경험하고 바로 그 적에게 기술을 배운 것이다. 그렇다면 돈은 어디에서 나왔나.

각성과 준비의 힘, 도자기
1867년 파리박람회가 열렸다. 사가번과 사쓰마번이 도자기를 출품했다. 사가번 아리타 도자기는 일본 열풍을 일으킬 정도로 인기였다. 아리타초사(有田町史)에는 박람회가 종료되고 11월 29일 박람회 대표단 통역가 고이데 센노스케(小出千之助)가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귀국편 화물은 철포(鐵砲)를 본체로 하고 나사 등이며 여기에 따로 구입한 물품을 더해서 다음 달 나가사키로 가는 배에 싣고 갈 예정입니다.' 아리타초사를 쓴 사가 미야타 고타로(宮田幸太郞)는 "막부 마지막 15년간 아리타 도자기 무역 자료는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인멸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자기로 국내외에서 번 돈이 저 거대한 군수산업 운용에 투입됐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가현 혼마루역사관 마당에는 나베시마 나오마사가 만든 철제 대포가 서 있다. 전시실에는 근대 과학기술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나오마사가 부활시킨 도자기마을 아리타 산꼭대기에는 도조(陶祖) 이삼평 기념비가 서 있다. 글씨를 쓴 사람은 나베시마 나오미쓰(鍋島直映)다. "일본의 보물을 만든다"며 이삼평을 납치해간 나오시게(直茂)의 후손이다. 뒷면에는 찬사가 가득하다. 세 글자가 눈에 띈다. '대은인(大恩人)'. 그냥 은인이 아니라 '대은인'이다. 서양 그 어느 국가도 이후 일본을 침략하지 못했다.

*

1866년 프랑스군의 병인양요를 치르고 조선은 강화도 덕진진에 외국 선박 항해 금지 선언비를 세웠다. 1871년 페리 제독의 외손자 로저스가 이끄는 미국 함대가 조선 강화도 염하(鹽河)에 진입했다. 조선 수군이 김포와 강화 양안에서 선제 포격을 퍼부었다. 조선 수군은 전멸했다. 각성과 준비와 실천의 부재가 만든 전사들의 장엄한 죽음이었다.


〈주요 참고 자료〉

1. 논문: '일본 사가현 아리타의 조선 도공에 관한 일고찰'(허성환)'일본의 군사 기록에 대한 고찰'(박
지영) '아편전쟁과 조선, 일본'(하정식) '동아시아의 개항: 난징조약에서 강화도조약까지'(강진아) '19世紀後半の伊萬里燒生産におけるヨ―ロッパの影響'(阿久津マリ子) '近代における有田陶業技術の變遷'(鈴田由紀夫)

2. 단행본: '有田町史-陶業編1'(有田町) '조선을 탐한 사무라이'(이광훈) '메이지유신이 조선에 묻다'(조용준) '明治日本の産業革命遺産'(岡田晃)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03/2019040300076.html

Tuesday, March 19, 2019

148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1] 1543년 무슨 일이 벌어졌나

[148]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1] 1543년 무슨 일이 벌어졌나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15세기 유럽은 대항해의 시대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경쟁적으로 동서로 배를 띄워 무역로를 개척했다. 동아시아에서는 1405년 무슬림 환관 정화가 이끈 명나라 함대가 아프리카까지 진출했다. 세계는 연결되고 있었다.

16세기가 왔다. 1000년 유럽 지성사를 억누르던 천동설이 폐기됐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적 탐구와 탐험의 시대가 도래했다. 동아시아의 끝, 일본에 마침내 유럽인이 상륙했다. 일본은 그들로부터 철포(鐵砲)를 손에 넣었다. 지구는 고속으로 돌고 있었다. 그 지구 위에서 조선은 성리학 교육기관이자 사대부 정치의 본산, 서원을 설립했다.

이 모든 일이 같은 해 몇 달 차이로 벌어졌으니, 서기 1543년이다. 이후 20세기까지 유럽, 일본과 조선 역사는 다른 길을 걸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이 알아야 할, 그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
지구가 움직이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1543년 3월 25일 유럽 발트해에 맞닿아 있는 폴란드 북쪽 작은 도시 프롬보르크에서, 프롬보르크 성당 사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해 전 겨울 뇌출혈로 오른쪽 몸이 마비된 상태였다. 그의 제자 예르지 레티크가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출판한 논문이 프롬보르크에 배달됐다. 제목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다. 저자는 코페르니쿠스 자신이다. 몇 년을 망설이며 미루다 발표한 논문이었다.

라틴어로 쓴 논문 서문에 코페르니쿠스는 이렇게 썼다. '그들이 아무리 제 연구에 대해 비난하고 트집을 잡더라도 저는 개의치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들의 무모한 비판을 경멸할 것입니다.' 비난을 예상하고도 그가 내뱉은 주장은 '지구는 돈다'였다. 이미 의식을 잃은 코페르니쿠스는 자기 논문을 보지 못했다. 5월 25일 코페르니쿠스가 죽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자기가 봉직하던 성당 안에 묻혔다.
지구가 돈다! 신이 지배하던 중세(中世) 1000년 동안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주장이었다. 저자가 죽고 73년이 지난 1616년 논문은 교황청 금서(禁書) 목록에 올랐다. 불과 4년 뒤 논문은 금서에서 해제됐다.

그리고 1839년 2월 19일 코페르니쿠스가 태어난 폴란드 토룬 시청 앞 광장에 그를 기리는 동상이 건립됐다. 동상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Terrae Motor Solis Caeli Que Stator'. 독일 과학자 알렉산더 훔볼트(1769~1859)가 썼다. 뜻은 이러했다. '지구를 움직이고 태양과 하늘을 멈춘 사람'. 바티칸은, 세상은,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더 이상 감출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인간은 신에 속박되지 않았다. 지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섯 달 뒤 일본, 철포를 구입하다
다네가시마 도키타카
다네가시마 도키타카
코페르니쿠스가 논문을 발표하고 정확하게 다섯 달, 그가 죽고 석 달 뒤 명나라 상선 한 척이 일본에 도착했다. 1543년 8월 25일이다. 일본 가고시마 남쪽에 있는 다네가시마(種子島)라는 작은 섬이었다. 선장 이름은 명나라 사람 오봉(五峯)이고, 100명이 넘는 선원은 모두 외모가 기이했고 말도 달랐다. 오봉은 이들이 '서남만인(西南蠻人)'이라고 했다. 동남아시아보다 더 서쪽, 유럽에서 왔다는 뜻이다. 다네가시마 도주(島主) 다네가시마 도키타카(種子島時堯)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에 호기심을 보였다. 도키타카는 열다섯 살이었다.

포르투갈 사람 프란시스코 지모로와 크리스토 페로타가 속이 뚫린 두세 척(尺)짜리 막대기를 보여줬다. 술잔을 멀찍이 바위에 놓고 막대기 끝에 불을 붙이니 번개 같은 빛과 천둥소리가 터지며 술잔이 박살났다. 은산(銀山)도 부수고 철벽(鐵壁)에 구멍을 낼 수 있을 정도였다.

도주 도키타카는 거금을 주고 철포 2자루를 샀다. 한 자루는 대장장이 야이타 긴베(八板金兵衛)가 역설계해 1년 만에 국산화에 성공했다. 한 자루는 당시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에 헌상했다. 또 1년 뒤 도주 도키타카는 오사카에서 온 상인에게 철포 제조법을 공개했다. 철포는 삽시간에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555년 음력 5월 21일 왜인(倭人) 평장친(平長親)이 총통(銃筒) 한 자루를 들고 부산으로 와 귀화를 요청했다. 그 정교함과 파괴력을 본 대신들이 "낡은 종을 녹여 총통을 제작하자"고 왕에게 건의했다. 13대 조선 국왕 명종은 "옛 물건은 신령한 힘이 있다"며 거부했다. 1589년 대마도주 평의지(平義智)가 조선 정부에 조총(鳥銃)을 헌상했다. 정부는 무기고에 조총을 집어넣고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590년 철포로 무장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이 일본을 통일했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했다. 다네가시마 도키타카의 아들 히사토키(久時)도 참전했다. 지구는 격렬하게 회전 중이었다.

조선 '성리학의 나라'가 되다
주세붕
주세붕
유럽에서 신의 권위가 추락하고 이웃 일본은 그 세상과 접촉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날짜는 기록에 없다. 조선 영주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서원(書院)을 세웠다. 성리학 성현을 제사하는 사당이며 선비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이라고 했다. 이름은 송나라 주희(朱熹)가 세운 백록동서원 이름을 따서 백운동서원이라 했다. 부임한 지 2년째, 흉년이 내리 3년 지속되던 날이었다. 누군가가 물었다. "학교가 있는데 어찌 서원을 세울 필요가 있으며, 흉년을 당하였으니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주세붕이 이리 대답했다. "주자가 백록동서원을 세울 때는 금나라가 중국을 함락하여 천하가 피비린내로 가득하였고 남강 땅은 큰 흉년으로 벼슬을 팔아 곡식으로 바꿔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다. 위태로움과 곤궁함이 그토록 심하였는데도 그가 세운 서원과 사당이 한둘이 아니었다. 교육은 난리를 막고 기근을 구제하는 것보다 급하다."
이후 조선은 성리학(性理學)의 조선이 되었다. 주자(朱子)의 조선이 되었다. 성리학은 나날이 발전하여 조선 정신문화는 찬란하게 꽃을 피웠다. 대신 주자와 성리학에 반하는 학문은 암흑기를 맞았다. 자기 발로 걸어온 철포를 팽개쳤고 예고된 전쟁에 손을 놓았다. 하늘이어야 할 백성의 경제활동을 탐욕이라고 규정하며 상업과 공업을 억압하고 조선 팔도에 널린 금·은광을 폐쇄했다. 대신 중국을 하늘로 섬겼다.
세계사 연표
'왜놈' 일본은 조선에서 도입한 은 제련법으로 세계 2위 은 생산국이 되었다. 유럽 학문을 수용해 강병을 하고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 지구는 전속력으로 광대무변한 우주를 날아갔다. 유럽도, 일본도 목적지는 부국강병이었다. 그 흔적은 지구 곳곳에 남아 있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1/02/2019010200338.html

154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⑦임진왜란과 로마로 간 소년들

[154]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⑦임진왜란과 로마로 간 소년들

박종인의 땅의 歷史
선조, "문약해서 망했네"
임진왜란 와중인 1593년 음력 10월 22일 선조가 정기 어전회의를 주재했다. 1년 반 전 개전 보름 만에 의주로 도망갔다가 환도한 지 석 주째 되는 날이었다. 왕이 말했다. "경상도 풍속은 아들이 글을 잘하면 마루에 앉히고, 무예를 익히면(一子業武) 마당에 앉혀 노예처럼 여긴다(如視奴隷). 오늘날 같은 일은 경상도가 오도(誤導)한 소치다. 육상산(陸象山)은 자제들에게 무예를 익히게 했고 왕양명(王陽明)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 한다. 우리나라는 책만으로 애들을 가르쳐(只持冊子以敎子弟) 문무(文武)를 나누어 놓았다. 참으로 할 말이 없다."(1593년 10월 22일 '선조실록')

육상산과 왕양명은 성리학에 맞서는 실천적 유학을 주장한 사람들이다. 개국 후 200년 평화 시대가 파탄 난 이유를 선조는 남의 일 이야기하듯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국가 차원에서는 강병(强兵)이 없었고 개인 차원에서는 무(武)를 천시한 결과라는 것이다. 예리한 분석은 분석으로 그쳤다. 폐허가 된 경복궁을 보면서 역대 권력자와 그 집단은 강병과 부국의 길을 찾지 않았다. 조선을 작살낸 일본은 책과 쌀을 구걸해 가는 무식한 소국(小國)에 불과했다. 정말 그랬을까.

神, 일본에 상륙하다
1543년 포르투갈 소총을 일본이 수입한 뒤 유럽에서는 일본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다. 국부 창출을 위해 새 무역 시장을 열려는 각국 눈이 일본으로 쏠렸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선언한 종교개혁 불길이 대륙을 휩쓸었다. 개신교에 맞서는 새 가톨릭 시장 수요가 폭증했다. 유럽 제국이 신항로로 배를 몰았다. 1534년 8월 15일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 생드니 수도원에서 가톨릭 사제 7명이 제수이트회를 창설했다. 예수회라 불리는 이 조직은 청빈과 정결, 순명(順命)과 함께 복음 전파라는 행동을 제4의 서원(誓願)으로 내걸었다. 1549년 인도에서 활동하던 창설 멤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에 상륙했다. 이듬해 하비에르는 나가사키 히라도(平戶島)에서 첫 포교를 하고 1552년 중국에서 죽었다. 히라도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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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가사키현 오무라시 모리조노(森園) 공원에는 네 소년 동상이 서 있다. 1582년 양력 2월 20일 이 바닷가에서 로마로 떠난 덴쇼유럽소년사절단(天正遣歐少年使節團)이다. 이 10대 소년들은 유럽 각국을 순례한 뒤 8년 6개월 만인 1590년 귀국했다. 이듬해 교토에 있는 대저택 주라쿠다이(聚樂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소년들과 동행한 포르투갈 사제들에게 조선과 중국 침략 계획을 알렸다. 이보다 석 달 전 같은 방에서 조선통신사 일행도 중국 침략 계획을 들었다. 일본은 세계와 상대 중이었고 조선은 그런 일본을 무시했다. /박종인 기자
전국시대 권력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교토를 방문한 예수회 루이스 프로이스 일행에게 선교의 자유를 전격 허용했다.(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1569년 4월 28일이었다. 출입항인 나가사키는 이내 '작은 로마'라고 불릴 정도로 예수회 선교사들이 몰려들었다.(노성환, '일본 나가사키현의 조선인 천주교도에 관한 연구', 일어일문학 49집)

신(神)의 강림을 허가받은 프로이스는 노부나가에게 유리 플라스크에 담긴 오돌토돌한 포르투갈 사탕 콘페이토(confeito)를 선물했다. 지금 일본인이 '콘페이토(金平糖)'라 부르는 '별사탕'이다.

1591년 3월 3일 풍신수길 저택
인도에서 온 예수회 사절단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저택을 방문했다. 교토에 있는 저택 이름은 주라쿠다이(聚樂第)다. 일본인은 가톨릭 신도를 기리시탄이라 불렀다. 기리시탄은 큰 세력으로 진화했다. 지역 영주, 다이묘(大名) 중에서도 기리시탄이 나타났다. 기리시탄 세력의 급성장에 놀란 히데요시는 1587년 7월 24일 무역과 신앙은 허용하되 선교를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렸다. 이번 사절단은 그 철회를 요청하는 사절이었다.

일본 측이 제공한 말과 가마를 타고 사절단이 주라쿠다이로 행진했다. 인도 청년이 양산을 들고 말을 몰았고 포르투갈 기수가 뒤를 따랐다. 226대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준 금빛 테두리 장식의 빌로드 외투를 걸친 20대 특별 수행단 4명도 끼어 있었다. 이들 옆에는 포르투갈어와 일본어를 통역할 사제 주앙 로드리게스도 있었다(40년 뒤 우리는 로드리게스를 다시 만나게 된다).
경남 진주성에 펄럭이는 장수 깃발.
경남 진주성에 펄럭이는 장수 깃발. 1593년 2차 진주성 전투는 사대(事大) 본국 명군의 철저한 외면 속에 치러졌다.
주라쿠다이는 기와에 금박을 둘렀고 건물 사방에는 해자가 설치돼 있었다. 더 바랄 수 없을 정도로 청결한 넓은 방에서 이들은 히데요시를 만났다.(루이스 프로이스) 의전이 오가고, 젊은 수행단이 유럽 고악기(古樂器) 클라보, 아르파, 라우데, 라베키냐를 연주하며 성가를 노래했다. 연주가 끝나고 히데요시가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매우 자랑스럽구나."

유럽으로 떠난 아이들
이들 이름은 이토(伊東) 만쇼, 지지와(チチ石) 미켈레, 하라(原) 마르티노, 나카우라(中浦) 줄리아노. 열두세 살에 유럽으로 떠나 8년 반 만에 성인이 되어 돌아온 덴쇼유럽소년사절단(天正遣歐少年使節團)이었다. 1582년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 같은 기리시탄 다이묘들이 교황 접견을 목적으로 파견한 소년들이다. 그해 2월 20일 오무라를 떠난 이들은 2년 뒤인 1584년 8월 포르투갈 리스본에 도착했다. 마카오, 믈라카, 고아를 거쳤고 리스본 이후에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펠리페 2세를 만났다. 피렌체, 로마, 베네치아, 베로나를 거치며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가끔 지지와는 엄마가 만든 주먹밥을 먹고 싶다고 울기도 했고, 하라는 천연두를 앓기도 했다. 황금의 나라 지팡구에서 온 소년들은 어딜 가든 환영을 받았다. 1585년 한 해에 유럽 전역에서 이들에 관한 서적 48권이 쏟아졌다.(김혜경, '발리냐노의 덴쇼소년사절단의 유럽 순방과 선교 영향', 선교신학 52집, 2018) 일정을 마친 이들은 구텐베르크식 활판 인쇄기와 유럽 지도와 그림을 일본으로 가져왔다.

사절단 소년들 본인은 귀국 후 불우했다. 선교는 금지됐고 기리시탄 다이묘들은 죽었다. 결국 이들은 배교했거나 처형됐다. 하지만 유럽 최강국 포르투갈, 스페인 그리고 바티칸은 이들을 통해 일본을 다시 한 번 교역 파트너로 각인했다.

조선만 몰랐던 전쟁
일본 나가사키현 히라도에 있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기념비.
일본 나가사키현 히라도에 있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기념비. 예수회 창립 멤버인 하비에르는 철포의 일본 전래 7년 뒤인 1550년 히라도에서 첫 포교를 했다.
1590년 11월 7일 예수회 사절단에 앞서 조선통신사가 똑같은 대저택 같은 방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났다. 방문 전 부사 김성일을 제외한 일행은 평복을 입었다.(김성일, '해사록·海槎錄' 행장) 3개월 뒤 예수회 사절단은 "조선 사절단이 천박하게 정강이를 드러내고 걸어 경멸당했다"고 기록했다.(프로이스, '일본사') 접견 나흘 뒤 국서가 전달됐는데 "글이 오만하고 '한걸음에 대명국(大明國)으로 들어가겠다'느니 '귀국이 앞잡이가 되어 입조(入朝)해 달라'느니 하는 말들이 있었다. 크게 놀라 의리에 의거하여 거절하였다."('해사록') 1591년 3월 25일 귀국한 정사 황윤길은 전쟁이 난다고 했고, 부사 김성일은 두려워할 것 없다고 했다.(1591년 3월 1일 '선조수정실록') 선조는 부사의 말을 취했다.

통신사들이 서울에 도착하기 전 예수회 사절단에 히데요시가 공식 서한을 전달했다. '반드시 중국 왕국을 정복하리라 결심하였다.' 중국과 조선 침공은 이미 1586년부터 예수회 사제들에게 공포했던 사안이었고, 히데요시는 그때마다 "조선과 중국을 교회의 땅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프로이스, '일본사') 조선만 몰랐다. 외면했거나.

사대가 안 지켜준 안보
1593년 6월 오사카에서 명과 일본 사이 강화협상이 벌어졌다. 명나라 사절 심유경에게 일본은 "진주성을 공격할 예정"이라고 알려줬다. 심유경은 급히 조선 주둔 명군에 진주 철수를 요청했다.(프로이스, '일본사') 승산 없는 전투에 의병장들도 참전하지 않았다. 결국 고립된 진주성에서는 직립(直立)해 있는 모든 생명이 전멸했다. 이미 개전 1년 만에 선조는 "명군이 나아가 싸울 뜻이 전혀 없으니 통탄스럽다"고 알아차렸다.(1593년 4월 6일 '선조실록') 사대(事大)는 나라를 지켜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선조는 명나라가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외쳤다. 그 손자 인조가 죽었을 때에도 실록은 '사대(事大)에 매우 근신하시어 만 굽이 물이 반드시 동으로 향해 가는 마음은 신명에게 질정할 만하셨다(事大甚謹 其萬折必東之心 可質神明也)'고 찬양했다.('인조실록' 인조대왕행장)

문명사의 충돌과 임진왜란
도도하되 막지 못할 강물이 조선에서 과격하게 만났다. 대항해의 시대, 코페르니쿠스의 과학과 군사기술과 자본이 만난 사건이 임진왜란이었다. 주력군인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는 기리시탄 부대였다. 고니시는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이 있는 기리시탄 다이묘였다. 고니시 부대 깃발은 십자가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잡았을 때 고니시는 가톨릭 교리에 따라 할복자살을 거부하고 목이 잘려 죽었다. 일본 포교사를 기록한 당시 예수회 사제루이스 프로이스는 그 전쟁을 '코라이 전쟁(Bellum Corai)'이라고 불렀다.(안재원 등, '경성제국대학도서관에 소장된 동서교류사 문헌 조사') 쇄국(鎖國) 또한 나라를 지켜주지 않았다.

하멜의 탈출과 데지마(出島)
1653년 효종 4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 스페르웨르호가 제주도에 표착했다. 하멜을 위시한 생존 선원들은 조선에 13년 동안 억류됐다. 하멜이 쓴 기록에는 1666년 탈출할 때까지 자기네가 13년 동안 한 일들이 적혀 있다. 양반집 광대짓과 땔감 베기와 잡초 뜯기와 절집 누더기와 음식 구걸. 그 강제 무급(無給) 단순 노동 13년이 억울해서 밀린 월급 받기 위해 쓴 보고서가 '하멜 표류기'다.

그때 일본 에도 정권은 조선처럼 쇄국정책을 펴고 있었다. 그런데 하멜이 13년20일 만에 도착한 나가사키에는 그믐날 별처럼 세계를 향해 날카롭게 빛나는 문이 열려 있었다. 이름은 '데지마(出島)'였다. 〈⑧성리학과 란가쿠(蘭學)에서 계속〉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2/27/2019022700010.html

155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⑧성리학과 난가쿠(蘭學)·上

[155]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⑧성리학과 난가쿠(蘭學)·上

박종인의 땅의 歷史
하멜의 추억

1666년 9월 4일 억류 생활 13년 만에 조선을 탈출한 하멜 일행은 사흘 만에 일본 규슈 북서쪽 작은 섬 히라도(平戶島)에 도착했다. "풀이나 뜯는 노예로 사느니 죽는 게 낫다"며 감행한 탈출이었다. 10월 25일 나가사키로 이동한 하멜은 일본인 관리로부터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질문번호46번이다. "왕은 왜 당신을 보내주지 않았나?" "왕은 조선이 다른 나라에 알려지기를 원치 않기에 외국인을 결코 보내지 않는다고 했다." 설명이 이어졌다. "조선인은전세계에 나라가 12개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옛 기록에 나라가 8만4000개라고 적혀 있지만 태양이 한나절 동안 그렇게 많은 나라를 다 비출 수 없기 때문에 지어낸 얘기라고들 했다."('하멜표류기') 3년 뒤 나가사키에 있던 네덜란드 상관(商館·무역사무소)이 바타비아(자카르타) 네덜란드 총독부에 보고했다. "조선은 가난한 데다 교역을 원치 않는다. 항구도 없다. 일본과 중국 또한 우리와 조선의 교역을 원치 않는다."(1669년 10월 5일 나가사키 상관이 바타비아 총독에게 보내는 서한)

그해 12월 10일 네덜란드에서 건조한 '코리아호(jaght Corea)'가 바타비아에 입항했다. 선박명이 '코리아'라면 조선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코리아호는 조선과 무관하게 사용돼다가 10년 뒤 경매로 매각됐다.(헤니 사브나이에 Henny Savenije, '하멜 이전의 네덜란드와 영국의 통상 시도 및 하멜의 조선 체류', 2002) 자, 하멜이 심문받은 그 섬, 데지마(出島) 이야기다.

해적의 시대, 쇄국의 시대
1494년 6월 7일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지구를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반씩 나눠줬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이라는 이 허황된 조약을 통해 두 나라는 지구의 동반구와 서반구를 신으로부터 물려받았다. 신이 허락한 대항해시대가 개막했다. 식민지 전쟁이 불붙었다. 158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와 영국이 뒤를 이었다. 식민지 개척보다는 식민지 금은보화를 실은 상선 약탈이 쉬웠다. 바다에는 해적 떼가 들끓었다. 그사이 동아시아 3국, 중국과 조선과 일본은 나라 문을 걸어 잠갔다. 명은 동아시아 바다에 들끓던 해적이 골치였다. 조선은 명·청에만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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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에 있었던 인공 섬 데지마(出島)는 에도시대 세계를 향해 열린 문이었다. 네덜란드는 이 작은 섬에 무역사무소를 만들고 일본과 교역을 했다. 조선이 1%의 가능성도 열어놓지 않고 국가를 완전히 닫은 데 반해, 에도막부는 쇄국정책 속에서도 데지마만은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위해 열어놓았다. 17세기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일본 지식사회와 권력층은 데지마를 통해 세계를 파악하고 근대 문물을 받아들였다. 사진은 데지마 네덜란드 상관의 상관장 집무실이다. /박종인 기자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잡았다. 그때 일본은 예수회와 프란치스코수도회의 맹활약으로 기리시탄(가톨릭) 세력이 30만명까지 급증해 있었다. 이에야스의 에도(江戶) 막부는 기리시탄 세력을 탄압하며 쇄국에 돌입했다. 기리시탄 처형과 기리시탄을 중심으로 한 농민 반란(시마바라의 난·1637)이 이어졌다. 1637년 일본은 가톨릭 세력을 추방하고 완전히 나라 문을 잠갔다. 추방된 집단은 예수회와 프란치스코수도회, 그리고 이들을 앞세웠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다. 개신교 국가 네덜란드는 예외였다. 네덜란드는 목적이 오로지 교역이었으니까.

거기에 미우라 안진(三浦按針)이 살다가 죽었다. 안진은 하타모토(旗本)다. 하타모토는 막부 쇼군을 알현할 수 있는 상급 무사다. 상급 무사 미우라 안진은, 영국인이다. 본명은 윌리엄 애덤스다.

영국인 사무라이, 미우라 안진
1602년 후발 주자 네덜란드는 시장 개척 자본을 위해 왕명으로 동인도회사를 설립했다. 세계 최초 주식회사다.

영국인 윌리엄 애덤스는 동인도회사 창설 초기 직원으로 대서양을 건너고 태평양을 건넜다. 런던 빈민가 라임하우스에서 성장한 서른다섯 먹은 사내는 네덜란드가 비밀리에 선단을 꾸린다는 소식에 무작정 지원했다. 1599년 출항한 선단 5척 가운데 두 척은 스페인 해적에게 나포됐고 한 척은 돌아갔다. 한 척은 태평양에서 침몰하고 애덤스가 탄 리프데호만 남았다. 1600년 4월 19일 탈탈 털린 리프테호가 표류 끝에 일본에 도착했다.
일본 나가사키현 히라도에 있는 영국인 윌리엄 애덤스의 무덤.
일본 나가사키현 히라도에 있는 영국인 윌리엄 애덤스의 무덤. 1600년 네덜란드 상선을 타고 일본에 표착한 애덤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미우라 안진(三浦按針)으로 이름을 바꾸고 상급 사무라이 신분과 토지와 돈을 받고 에도막부 외교 및 통상 고문으로 일하다 죽었다.
오사카에서 이에야스를 만난 애덤스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 지구를 도는 여러 항로와 선박에 대해 한밤중까지 얘기했다. 신부들은 네덜란드 배를 타고 온 이 이교도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애덤스는 투옥됐다. 두 번째 만남에서 이에야스는 영국과 전쟁과 평화와 모든 종류의 짐승과 천국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애덤스는 석방됐다. 1603년 이에야스는 애덤스에게 유럽식 선박 건조를 명했다. 애덤스는 80t짜리 배를 건조한 데 이어 120t짜리도 건조해 성공리에 진수시켰다.

이에야스는 애덤스를 통상과 외교 고문으로 삼았다. 망설이는 애덤스에게 이에야스는 후지산이 보이는 저택과 농노 80~90명이 딸린 영지를 선물하고 하타모토 작위를 내렸다. 빈민가 출신 영국인은 이후 오래도록 귀국을 요청하지 않았다. 대신 미우라 안진이라는 이름으로 살다 죽었다. 미우라는 그가 살던 영지였고 안진은 '도선사'라는 뜻이다. 애덤스는 히라도(平戶島)에 묻혀 있다. 조선을 탈출한 하멜이 처음 상륙했던 그 섬이다.

쇄국, 그리고 데지마의 개항
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
가톨릭 세력이 퇴조할 무렵 네덜란드와 영국 상선이 일본을 찾았다. 영국이 먼저, 네덜란드가 나중에 히라도에 상관 개설을 허가받고 교역을 시작했다. 미우라 안진을 통하면 이 개신교 국가들에 안 되는 일이 없었다. 일본 예법을 무시했던 영국은 상관장 콕스가 불화를 일으킨데다 인도시장에 집중하기 위해 1623년 상관을 폐쇄했다. 1637년 포르투갈 상인들이 추방됐다. 이들은 나가사키 상인들이 만든 인공섬 데지마(出島)에 상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4년 뒤 데지마는 네덜란드인이 차지했다. 길이는 180m에 폭은 60m 정도. 통역가와 창녀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일본인도 들락거릴 수 없었고, 그 어떤 네덜란드인도 나올 수 없었다. 오로지 교역만 허용되는 독신 네덜란드인의 감옥이었다. 그런데 이게 일본을 바꿀 줄은 아무도 몰랐다.


열린 지도자와 열린 학자
매년 기압계, 온도계, 비중계, 카메라, 환등기, 선글라스, 메가폰 등 여러 물건이 수입됐다. 매년 봄 에도에 네덜란드 상인이 오면 나가사키야(에도의 네덜란드 상인 구역)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스기타 겐파쿠, '난학사시', 1815)

1716년 취임한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재위 1716~1751)는 실용주의자였다. 그가 행한 교호개혁(享保改革)에는 토지 개발과 세금 정액제 그리고 서양 서적 금지령 완화가 포함돼 있다. 네덜란드어 번역 관청도 설립했다.(김성수, '해체신서와 일본의 서약의학 수용')

어느 날 요시무네에게 데지마 통역사가 상소를 했다. "말로만 통역을 하게 하니 오류가 많다. 문자를 배우게 해 달라." 그림이 많이 들어 있는 책을 보냈더니 요시무네가 매우 즐거워하며 말했다. "설명을 읽을 수 있다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다. 에도에서도 누군가 배운다면 좋을 것이다."(스기타 겐파쿠) 학자들은 해금된 네덜란드 책을 돌려가며 읽었다. 사람들은 그 학문을 난가쿠(蘭學)라 불렀다. 화란(네덜란드) 학문이라는 뜻이다. 에도는 학문의 자유 시대를 맞고 있었다.

'요 임금 창자나 폭군 걸의 창자나'
맨 먼저 자극받은 사람은 의사들이었다. 도무지 중국 전통 의서와 실제 몸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이다. 1754년 의사 야마와키 도요(山脇東洋)가 사형수를 대상으로 첫 해부를 했고 5년 뒤 첫 해부학 서적 '장지(藏志)'를 펴냈다. 1774년 또 다른 의사 스기타 겐파쿠와 그 동료들이 데지마 관리로부터 네덜란드 해부학서 '타펠 아나토미아(Ontleedkundige Tafelen, 1734)'를 번역해 '해체신서(解體新書)'를 출간했다. 야마와키 도요가 이리 말했다.
18세기 일본 의사들이 펴낸 서적들.
18세기 일본 의사들이 펴낸 서적들. 왼쪽부터 일본 최초 해부학 서적 '장지(藏志·1759)', 최초의 유럽 해부학 번역서 '해체신서(解體新書·1774)', 그리고 해체신서 번역 작업을 기록한 난학사시(蘭學事始·1811). 데지마를 통해 배운 신학문 '난가쿠(蘭學)'는 일본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이론은 뒤집힐 수 있지만 사물이 어찌 속이겠는가. 이론을 앞세우고 사실을 뒤에 넣으면 상지(上智)라도 실수가 없을 수 없다. 요 임금 내장도 내장이고 폭군 걸 내장도 내장이고 북쪽 남쪽 오랑캐 창자도 창자일 뿐이다(理或可顚倒 物焉可誣 先理後物 則上智 不能無失也 堯之臧亦然 桀之臧亦然 蠻貊亦然).' (야마와키 도요, '藏志', 1759) 이론은 뒤집힐 수 있되 사실(Fact)은 어찌할 수 없다! 이 명쾌한 답을 얻어내면서 일본 지성계는 코페르니쿠스적으로 돌변했다. 에도에만 600군데가 넘는 서점과 이동도서관을 통해 난가쿠 책들은 구름처럼 퍼져나갔다.(이종찬, '조선 실학 대 일본 난학') 오사카는 서적의 많음이 실로 천하 장관(大坂書籍之盛實爲天下壯觀)이었다.(신유한, '해유록', 1719)

개혁군주 정조와 지식의 독점
조선 22대 왕 정조(재위 1776∼1800)는 개혁 군주라 불렸다. 쇼군 요시무네보다 한 세대 뒤다. 정조가 청나라에서 '사고전서(四庫全書)'를 출판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고전서'는 역대 중국 왕조 서적을 종합한 백과사전이다. 1776년 북경 사신이 보니 출간이 미완성이라 사신들은 그 인덱스 격인 '고금도서집성' 5020권을 은화 2150냥을 주고 사왔다.(1777년 2월 24일 '정조실록') 정보는 낡았고, 유통도 되지 않았다.

'책을 사러 갔을 때 연경 서점 사람들이 비웃으며 "간행된 지 50년이 지났는데, 귀국은 문(文)을 숭상한다면서 이제야 사 가는지요? 일본은 나가사키에서 1부, 에도에서 2부 등 이미 3부를 구해 갔습니다"라 했다. 왕이 매우 보배롭게 애지중지하여 홍문관에 보관시키고 각신 이외 신하들과 서생(書生)들은 구경해본 자가 없었다.'(홍한주, '지수염필', 진재교, '국가권력과 지식, 정보' 재인용)

1791년 조선 또한 서학(西學, 기독교)이 문제가 되자 "홍문관에 소장돼 있는 서학 서적을 소각하자"는 상소가 올라왔다. 이에 왕은 "멀리 큰 거리에까지 내갈 것 없이 즉시 홍문관에서 태워버리라(卽令館中燒火)" 하였다.(1791년 11월 12일 '정조실록') 해부학 서적 '태서인신개설(泰西人身說槪)'도 분서(焚書)됐다.

2009년 3월 서울대의대에서 열린 한 심포지엄에서 1899년 일본 서양 의사가 1만5000명이 넘었다는 발표가 있었다. 1903년까지 대한제국 의학교 졸업생은 32명이었다. 원로교수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김옥주, '에도 말 메이지 초 일본 서양의사의 형성에 대하여', 의사학 제20권 제2호, 2011)

데지마 전시관에는 유럽 지식을 빨아들여 일본인 손으로 만든 기계들이 전시돼 있다.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달랐는가. 왜 달랐는가. 〈⑨성리학과 난가쿠(蘭學)·下에서 계속〉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06/2019030600021.html

156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⑧성리학과 난가쿠(蘭學)·中

156]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⑧성리학과 난가쿠(蘭學)·中

박종인의 땅의 歷史
일본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 아카마신궁 앞 부두에는 조선통신사 기념비가 서 있다. 정확하게는 조선통신사 상륙엄류지지(朝鮮通信使上陸淹留之地) 기념비다. '엄류(淹留)'는 머물렀다는 뜻이다. 2001년 한일의원연맹이 세웠다. 임진왜란 종전 후 조·일 양국은 각각 통신사와 왜관을 통해 교류를 재개했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 이어진 통신사는 한성을 떠나 부산~쓰시마~시모노세키~오사카를 거쳐 에도(江戶·현 도쿄)를 왕래했다. 나가사키 인공섬 데지마(出島)를 통해 근대 세계를 흡수하던 일본과 성리학적 세계관을 심화시키던 조선, 그 지성(知性)과 지도층이 충돌한 사건이었다. 틀림없이 많은 일을 겪었을 것이다. 많은 것을 느꼈음도 틀림없다.

조선 중화와 쇄국
병자호란 끝 날인 1637년 2월 24일 잠실 삼전도에서 조선 국왕 인조가 후금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했다. 치욕이었다. 실록은 '항복'이 아니라 '하성(下城)', '산성에서 내려왔다'고만 기록했다. 부도덕한 행위이기도 했다. 은혜로 치면 아버지와 같은(恩猶父子·1623년 3월 14일 '인조실록') 명을 배신하고 오랑캐 청에 군신 관계를 맹세했으니까. 조선 지배 질서를 유지하던 성리학적 세계가 한나절 만에 파괴됐다는 뜻이다. '아들은 아비를 알지 못하고 신하는 임금을 알지 못하여 짐승 무리가 될(子焉而不知有父 臣焉而不知有君 而混爲禽獸之類)'(송시열, '기축봉사', 1649) 두려운 세상이 닥쳐버린 것이다. 사림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해결책은 복수였다.

하지만 사대해야 할 명은 망하고 없었다. 복수해야 할 오랑캐는 힘이 너무 강했다. 17세기 권력을 잡은 노론(老論)은 복수를 포기했다. 대신 '조선을 통해 중화가 부활했다'는 소중화(小中華) 혹은 조선중화(朝鮮中華)를 들고 나왔다. 주야장천 입으로는 북벌을 외치지만 조선이 명을 계승했으니 굳이 복수할 이유가 없다는, 위대하고 고상한 정신 승리였다. 이후 조선 왕국 외교와 정치와 사회와 경제와 문화는 쇄국과 사대(事大)와 성리학 획일주의로 움직였다. 통신사를 통한 대일 외교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정보원, 데지마 풍설서
1641년 에도막부가 네덜란드에 독점무역권을 허용할 때 조건이 있었다. 나가사키 인공 섬 데지마에만 체류할 것, 그리고 정기적으로 에도로 와서 막부에 세계정세를 보고할 것. 네덜란드 상인들은 데지마에 앞서 히라도에 상관을 연 1633년부터 1850년까지 166차례 에도를 방문했다.(정하미, '조선통신사의 교토 체재와 조선인가도', 일본어문학 68집, 2015)그때마다 네덜란드 상관은 도쿠가와 쇼군과 수뇌부에 '풍설서(風說書)'를 전달했다. 풍설서는 네덜란드 상인들이 전 세계에서 수집한 국제 정세 보고서였다. 1666년부터는 일본어 번역본이 올라갔다. 1840년 아편전쟁 후에는 더 세밀한 '별단풍설서'가 올라갔다. 에도막부는 이를 통해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의 등장을 알았고 페리 제독이 몰고 온 미국 군함의 이름과 규모를 미리 알았다. 듣도 보도 못한 정보로 무장한 일본 외교관과 지성 앞에서 조선통신사는 무기력했고, 오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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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후 일본과 국교를 회복한 조선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보냈다(조선통신사사행도·국립중앙박물관). 성리학적세계관과 근대 세계관이 충돌하는 사건이었다. 일본은 조선의 실체를 파악하고 1811년 교류를 단절했다. 왼쪽은 시모노세키에 있는 조선통신사 상륙엄류지지 기념비, 위 지도는 통신사 이동 경로.
"왜 명나라 옷을 입었는가"
1711년 여덟 번째 통신사가 일본에 도착했다.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德川家宣) 취임 축하 사절이다. 일본 외교 파트너는 유학자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였다. 11월 5일 에도에서 조선 통신사들과 하쿠세키가 대화를 했다. 조선 정사 조태억이 '문재(文才)가 샘솟는다(泉湧)'고 격찬한 학자였다.

조태억이 말했다. "천하가 오랑캐를 따르지만 우리나라만은 대명의 제도를 고치지 않았다. 우리가 동주다(我獨爲東周)." 하쿠세키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왜 (은·주가 아닌) 명나라 옷을 입고 있는가. 그나마 (오랑캐) 청나라가 봐줘서 그 정도 아니겠는가?"('신정백석전집', '강관필담·江關筆談') 웃기지도 않다는 조롱이었다. 그가 말했다. "대서양(大西洋)과 구라파의 이탈리아, 네덜란드 사람들을 직접 보았고 지금 공(公)들과 한집에 있으니 기이하다." 부사 임수간이 아는 체를 했다. "대서양은 서역 '나라' 이름이다. 구라파와 이탈리아는 어느 곳에 있는가?" 하쿠세키가 반문했다. "귀국에는 만국전도가 없는가?"(임수간, '동사일기', '강관필담', 1712) '강관필담'은 조선·일본 양측에 있는 기록이다.

8년 뒤 1719년 사행에서는 쓰시마의 지한파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가 제술관 신유한을 따로 불러 말했다. "우리는 일본(日本)이다. 왜적(倭賊)이니 오랑캐 추장(蠻酋·만추)이라 멸시하지 말라."(신유한, '해유록', 1719) 호슈는 "예의 없는 나라는 없다. 조선은 시종 군신의 예를 폐하지 않았던 까닭에 중국이 예의 바르다 칭찬할 뿐"이라고 했다.(김선희, '일본 유자의 자국의식과 조선', 한국실학연구 9권 9호, 2005)

12차례 사행 내내 통신사들은 이렇게 잽과 스트레이트와 어퍼컷을 얻어맞았다. 성리학과 중화를 얘기하면 일본 측 파트너는 근대 지식으로 맞받았다. 조선이 성리학에 세뇌돼 있을 때 일본 학계에서는 주자학, 양명학과 근대과학, 난가쿠(蘭學)가 백가쟁명(百家爭鳴)을 하고 있었다.

"공자를 죽인다" "교화가 필요"
일본은 임진왜란 때 끌고 간 조선 선비 강항을 통해 성리학을 받아들였다. 이후 일본 성리학은 급속도로 주자학을 벗어났다. 네덜란드라는 문을 통해 들어온 유럽 학문과 지식은 중화 제일의 주자(朱子)를 버리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데지마에 전시된 네덜란드-일본어 사전(1833년).
데지마에 전시된 네덜란드-일본어 사전(1833년). 일본 통역사들과 네덜란드상관장 헨드릭 되프 공동 작품이다. 오른쪽은 1808년 지리학자 홋타 니스케(堀田仁助)가 제작한 지구본(시마네현립고대이즈모역사박물관). 데지마를 통해 습득한 유럽 학문 난가쿠(蘭學)는 일본 사회를 전방위적으로 변화시켰다.
주자학자인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1618~1682)는 '주자를 배워서 잘못된다면 주자 역시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文會筆錄·문회필록', 김선희 재인용) 안사이의 제자 아사미 게이사이(淺見絅齋)는 더 거칠었다. "다른 나라 군주 명을 받아 공자와 주자가 일본을 공격해온다면 내가 먼저 나서서 철포를 들고 공자와 주자의 목을 쳐 깨뜨리리라(以鐵炮擊破孔子朱子之首)."(淺見絅齋集, '淺見先生學談')

조선 통신사들은 그런 일본을 '교화가 필요한 오랑캐'라고 규정했다. 1763년 통신사 제술관 성대중은 "일본 학술은 긴긴 밤이라고 해야 옳으며 일본 문장은 소경"이라며 "책임은 오로지 우리나라 선비들에게 있다"고 했다.(성대중, '해사일기', 1764) 성대중이 제술관으로 갔던 1763년 11차 통신사는 그 세계관의 전쟁터였다.

"식견이 비루하다" 비난받은 통신사

1763년 7월 24일 영조는 시를 짓는 시험을 통해 사신을 골랐다. 선정된 통신사 정사 조엄과 부사 이인배, 종사관 김상익에게 영조는 '이릉송백(二陵松栢)'을 잊지 말라고 외우며 목이 메었다.(조엄, '해사일기' 8월 3일) 이릉송백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도굴한 성종과 중종릉을 뜻한다. 왕실을 유린했던 오랑캐를 뛰어난 문장으로 누르고 돌아오라는 당부다.

일본은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재위 1716~1751)의 교호개혁(享保改革)에 의해 난가쿠가 공식적으로 허용된 직후였다. 고학(古學)과 양명학(陽明學)과 국학(國學)과 서양 학문으로 겹겹이 갑옷을 두른 일본은 홑겹 주자학으로 무장한 조선 지식인들 훈계 대상이 아니었다. 중화 시스템을 교화하려는 조선 통신사에게 일본 학자들이 어퍼컷을 날렸다. '무력으로 안 되니 문사를 내세워 앞서려고 한다. 우리나라 학문이 어두운 틈을 타서 깃발을 드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이들이다.'(나카이 지쿠잔·中井竹山, '草茅危言·초모위언', 김선희 재인용) 시모노세키에서 유학자 다키 가쿠다이(瀧鶴臺·1709~1773)는 이렇게 조선 성리학자들을 '타일렀다'.

"우리 나가사키에 오는 외국 배가 120 ~130개국이다. 지구본을 보거나 '곤여전도(坤與全圖)'를 보거나 '명청회전(明淸會典)'과 '일통지(一統志)'를 봐도 실려 있지 않은 나라가 더 많다. 우주가 크고 나라가 많음이 이와 같다. 저마다 그 나라 도가 있어(其國各有其國之道) 나라가 다스려지고 백성이 편안해한다. 인도에는 바라문법과 불교 도(道)가, 서양에는 천주교, 회회교와 라마법이 있다. 모두 하늘을 대신해 나라가 다스려지고 백성이 편안한데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國治民安 又復何求)."(다키 가쿠다이, '장문계갑문사·長門癸甲問槎', 稟) "중국을 귀히 여기고 이적을 천시하니 식견이 비루하여 천지의 광대함을 알지 못한다(識見之陋 不知天地之大者)"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임채명, '장문계갑문사의 필담을 통해 본 조일 문사의 교류', 일본학연구 27집, 2009)

'이릉송백'을 되새기고 조선 중화의 위엄을 자랑하려던 통신사들은 참패하고 귀국했다. 예견된 참패였다. 12차 통신사 행사는 1811년 에도 대신 쓰시마에서 열렸다. 이후 일본은 통신사를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64년이 지난 1875년 철포로 무장한 군함 운요호를 강화도로 보냈다.

난가쿠 의사와 조선 의사
1748년 영조 24년 10차 통신사를 수행한 조선 의사 조숭수에게 오사카의 의사 다나카 쓰네요시(田中常悅)가 조언을 청했다. "우리나라에 개들 돌림병이 유행해 갑자기 미쳐 날뛰고 사람을 보면 번번이 물었다. 가르침을 베풀어주시라." 사람들이 질문을 담은 글을 돌려 읽고 조숭수가 답했다. "돼지 똥물을 쓰되 마신다(用猪糞水 呷之耳)"(다나카 쓰네요시·田中常悅, '和韓唱和附錄·화한창화부록', '의문7조', 김형태, '통신사 의원필담에 구현된 조일 의원의 성향 연구' 재인용)

6년 뒤 일본 의사 야마와키 도요(山脇東洋)가 사형수를 대상으로 해부를 실시하고 1759년 해부학 서적 '장지(藏志)'를 펴냈다. 4년 뒤 앞서 언급한 '이릉송백'의 1763년 통신사에 조선 의사 남두민이 수행했다. 1764년 1월 20일 오사카에서 일본 의사 기타야마 쇼(北山彰)가 남두민에게 물었다. "일 벌이기 좋아하는 의사가 사형수 배를 갈라 장부를 살펴보고 책 한 권을 지었다. '황제내경'에 적힌 것과 다르다고 했다. 소견은 어떠신지?"

잠시 후 남두민이 답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래된 법칙을 따르고 새로운 학설은 다시 구하지 않는다(不復求新說). 갈라서 아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는 짓이고 가르지 않고도 아는 것은 성인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니, 미혹되지 마시게(君勿惑)."(기타야마 쇼·北山彰, '雞壇嚶鳴·계단앵명', 김형태, '필담을 통한 조일 의원간 소통의 방식' 재인용)

각성 없는 통신사
1600년대 후반 일본은 4㎞마다 이정표가 서 있어 여행 거리를 즉시 알 수 있었고(데지마 주재 독일인 의사 캠퍼, '江戶參府旅行日記') 이미 1653년에 상수도가 완공돼 에도 시민은 수돗물을 마실 수 있었다.(오이시 마나부, '일본 근세도시 에도의 기능과 성격', 도시인문학연구 1호, 2009) 그 모습은 "금문(金文)이 찬란한 층루(層樓)와 보각(寶閣)은 또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신유한, 해유록, 1719) 그럼에도 신유한은 이렇게 평가했다. "번화 부귀(繁華富貴)가 잘못되어 일개 흙인형에게 입혀져 있구나." 남두민도, 신유한도 잘못은 없었다. 그 의사와 그 학자를 만든 성리학이 문제였다. 〈⑧성리학과 난가쿠(蘭學)·下〉에서 계속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13/2019031300027.html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③1543년 일본, 총을 손에 넣었다

150]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③1543년 일본, 총을 손에 넣었다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1543년 5월 24일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하고 죽었다. 지구는 급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4개월 뒤 유럽 기준으로 지구의 동쪽 끝 일본에 유럽인이 상륙했다. 국적은 포르투갈이고 이들이 상륙한 곳은 일본 가고시마 본토 남쪽 작은 섬 다네가시마(種子島)였다. 가고시마 항구에서 페리선으로 3시간 걸리는 섬이다. 이후 동아시아 역사는 '전적으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다.

상선의 좌초와 철포의 전래
철포를 받아들인 다네가시마 14대 도주 다네가시마 도키타카. 다네가시마 철포박물관 앞에는 칼을 차고 총을 손에 쥔 도키타카의 동상이 서 있다.
철포를 받아들인 다네가시마 14대 도주 다네가시마 도키타카. 다네가시마 철포박물관 앞에는 칼을 차고 총을 손에 쥔 도키타카의 동상이 서 있다.
1543년 9월 23일부터 며칠 사이 다네가시마에서 벌어진 일은 이러했다. '큰 배 한 척이 들어왔다. 선원이 100명이 넘었다. 생김새도 기이했고 말도 통하지 않았다. 동승했던 명나라 유생 오봉(五峯)은 이들이 서남만인(西南蠻人) 상인들이라 했다. 이틀 뒤 (당시) 도주 다네가시마 도키타카(種子島時堯)가 이들을 만났다. 이 가운데 모랑숙사(牟良叔舍)와 희리지다타맹태(喜利志多佗孟太)가 인사를 했다(포르투갈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1542년 믈라카해협 샴 왕국에서 무단 탈출한 프란시스코 제이모토와 안토니오 다 모타였다). 이들 손에 두석 자짜리 물건이 들려 있었다. 가운데가 뚫려 있었다. 바위 위에 술잔을 놓고 그 작대기에 눈을 대고 겨누니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소리가 나며 잔이 박살 났다. 은으로 만든 산도 쇠로 만든 벽도 뚫을 것 같았다. 도키타카는 "보기 드문 보물이로다(希世之珍)"라며 거금을 주고 두 자루를 사고 화약 제조법도 배워 가보로 삼았다. 이름은 철포(鐵砲)라 했는데, 누가 지은 이름인지는 알 수 없다. 열다섯 살 먹은 도키타카는 "내 어찌 이를 혼자 숨겨두겠는가"라며 기슈(紀州)에 있는 승병 장군 스노기노보(衫坊)에게 보냈다. 한 자루는 대장장이인 야이타 긴베(八板金兵衛)에게 하사해 역설계를 명했다.'(도키타카의 아들 다네가시마 히사토키(種子島久時), '철포기(鐵砲記)', 1606년)
이들과 함께 왔던 오봉은 '비단옷을 입고 다니는 왜구(倭寇)의 두목'이었다.(1556년 4월 1일 '명종실록') 본명이 왕직(王直)인 오봉은 동남아 일대에서 왜구를 지휘해 밀무역을 하다가 처형됐다.(1559년 11월 29일 '명실록')

철포의 국산화와 전국통일
유럽과 첫 만남에서 일본은 신무기를 얻었다. 마흔한 살 먹은 대장장이 야이타는 도주 도키타카가 명한 대로 철포를 분해해 국산화 작업에 들어갔다. 문제는 나사였다. 화약 폭발력에 탄환이 발사되도록 총열 뒤를 막아야 하는데, 아무리 불로 녹여 구멍을 막아도 부서지곤 했다. 야이타 족보에 따르면 외동딸 와카(若狹)를 각시로 주면 기술을 전수하겠다는 포르투갈인 제이모토의 요청에 "함께 며칠을 울다가" 시집을 보냈다. 이듬해 다른 배를 타고 돌아온 제이모토는 장인에게 나사산을 파서 고정하는 기술을 전수했다. 와카는 귀국 며칠 후 죽었다. 와카는 지금 다네가시마 공동묘지 왼쪽 언덕에 잠들어 있다.

'철포기'에는 '이듬해 돌아온 만종(蠻種) 상인에게 나사 제조술을 배워 제작에 성공했다'고 돼 있다. '도키타카는 아름다운 장식이 아니라 실전 효용(可用之於行軍)을 원했다. 사격술을 배운 이들 가운데 백발백중인 자가 셀 수 없었다. 이후 이즈미(和泉·현 오사카) 상인이 와서 기술을 배워 간 이래 기나이(畿內·교토 주변)까지 철포가 퍼져나갔다.'('철포기') 철포라고도 했고 그저 다네가시마라고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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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가고시마 남쪽 작은 섬 다네가시마 시내에 서 있는 대장장이 야이타 긴베(八板金兵衛)의 동상.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한 1543년 다네가시마에 상륙한 포르투갈인이 소총을 일본에 판매했다. 다네가시마 도주 도키타카는 소총 2정을 구입했고 대장장이 야이타는 그 명을 받고 이를 국산화했다. 이후 동아시아 역사는 너무나도 다르게 흘렀다. /박종인 기자
전국시대였다. 영주와 무사들이 권력을 향해 무한 혈투를 벌이던 때였다. 창과 활과 칼로 싸우던 그 악다구니판에 철포가 들어왔다. 1549년 열다섯 살이 된 미래의 영웅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철포 500자루를 구입했다. 1575년 6월 29일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이 나가시노에서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 부대를 전멸시켰다. 3열 횡대로 배치된 철포병 3000명이 연속으로 퍼붓는 총알에 기마 부대는 참패했다. 연합군은 3만8000명이었고 다케다 기마 부대는 1만2000명이었다. 1582년 암투 속에 오다 노부나가가 자살했다. 역시 철포로 무장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했다. 칼을 놓지 않은 자는 패했다. 총을 쥔 자는 이겼다.

조선의 철포 전래
'대마도주 평의지(平義智·본명은 소요시토시·宗義智) 등이 조총 수삼 정을 바쳤다. 조총은 군기시(軍器寺)에 보관하도록 명하였다. 우리나라가 조총이 있게 된 것은 이때부터다.'(1589년 7월 1일 '선조수정실록') 임진왜란 3년 전이다. 그런데 조총 전래가 이날이 처음이 아니었다.

일본이 철포를 얻은 지 11년이 지난 1554년 5월 21일 비변사가 명종에게 보고했다. "왜인(倭人) 평장친(平長親)이 가지고 온 총통(銃筒)이 지극히 정교하고 제조한 화약도 또한 맹렬합니다. 당상의 직을 제수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왕이 아뢴 대로 하라고 답했다.('명종실록')
다네가시마 철포박물관에 전시된 각종 총포들. 모두 일본 국산이다.
다네가시마 철포박물관에 전시된 각종 총포들. 모두 일본 국산이다.
이듬해 5월 22일 사간원이 명종에게 "총통을 주조해야 하는데 철재가 없으므로 버려둔 큰 종(鐘)으로 총통을 주조하게 해 달라"고 건의했다. 명종은 "이미 철재를 사들이도록 했으므로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사간원에 이어 비변사, 홍문관까지 철포 제작 허가를 청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명종은 다만 "어진 장수가 있어 잘 조치한다면 적들이 멋대로 날뛰지는 못할 일"이라고 했다. 이에 세 정승이 "조선에 원래 있는 천자(天字)총통, 지자(地字)총통 같은 중화기 또한 잡철(雜鐵)로는 만들 수 없다"고 거들었다. 명종이 딱 부러지게 답했다. "오래된 물건은 신령스러우니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물건을 부수어서 쓰는 것은 옳지 못하다."(1555년 6월 17일 '명종실록') 억지임을 알았는지, 명종은 "이 말은 삭제함이 옳겠다"고 사관에게 일렀다. 을묘왜변이 한창인 때였다.
대장장이 딸 와카의 무덤(사진 한가운데 돌).
대장장이 딸 와카의 무덤(사진 한가운데 돌).
그리하여 1592년 임진년, 일본 철포 부대가 조선을 짓밟았다. 다네가시마 도키타카의 아들 히사토키도 참전했다. "한 달 사이에 도성을 잃고 팔방이 와해됐다. 실은 왜적이 조총이라는 좋은 병기를 가지고 수백 보 밖에까지 미치고, 맞히면 관통할 수 있고, 총알 날아오는 것이 마치 바람을 탄 우박과 같으니, 궁시(弓矢)는 감히 서로 더불어 비교해 볼 수조차 없었다."(류성룡, '서애선생문집' 16권 잡저 '記鳥銃製造事') 적(敵)이 제 손으로 신무기를 거듭 바쳤음에도 알아보지 못했다. 매양 "우리나라가 본래 훌륭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 다른 기술에 기대하겠는가"라고 하다가(每以爲我國本有長技 何待於他耶) 참극을 맞은 것이다.('記鳥銃製造事') 1479년 일본에 통신사를 보낼 때 '화약 장인을 동행시키면 이를 배워 노략질에 쓸 터이니 동행을 금한다'(1479년 2월 26일 '성종실록')고 했던 첨단 군사 국가가 그리되었다.
하야부사의 귀환
다네가시마 일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의 우주선 발사장면.
다네가시마 일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의 우주선 발사장면. /JAXA
2010년 6월 13일 오후 11시 7분 일본 무인우주선 '하야부사(隼·송골매)'가 호주 우메라 사막에 착륙했다. 발사 7년 만이었다. 소행성 이토카와 시료를 채취하러 발사됐던 하야부사는 계기 고장이 연속되면서 우주 미아가 됐다. 일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는 그 7년 동안 원격 수리를 계속해 하야부사를 부활시켰다. 만신창이가 된 하야부사는 60억㎞를 날아와 시료가 담긴 캡슐을 사막에 떨어뜨리고 산화(散華)했다.

하야부사를 발사한 일본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 발사기지가 다네가시마에 있다. 1543년 맹렬하게 회전하는 지구에서 유럽과 일본이 연결된, 신문물이 동양에 상륙한 그 섬이다. 그 1543년 조선에서는 조금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1543년 조선, 서원을 열었다'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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