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19, 2019

154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⑦임진왜란과 로마로 간 소년들

[154]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⑦임진왜란과 로마로 간 소년들

박종인의 땅의 歷史
선조, "문약해서 망했네"
임진왜란 와중인 1593년 음력 10월 22일 선조가 정기 어전회의를 주재했다. 1년 반 전 개전 보름 만에 의주로 도망갔다가 환도한 지 석 주째 되는 날이었다. 왕이 말했다. "경상도 풍속은 아들이 글을 잘하면 마루에 앉히고, 무예를 익히면(一子業武) 마당에 앉혀 노예처럼 여긴다(如視奴隷). 오늘날 같은 일은 경상도가 오도(誤導)한 소치다. 육상산(陸象山)은 자제들에게 무예를 익히게 했고 왕양명(王陽明)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 한다. 우리나라는 책만으로 애들을 가르쳐(只持冊子以敎子弟) 문무(文武)를 나누어 놓았다. 참으로 할 말이 없다."(1593년 10월 22일 '선조실록')

육상산과 왕양명은 성리학에 맞서는 실천적 유학을 주장한 사람들이다. 개국 후 200년 평화 시대가 파탄 난 이유를 선조는 남의 일 이야기하듯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국가 차원에서는 강병(强兵)이 없었고 개인 차원에서는 무(武)를 천시한 결과라는 것이다. 예리한 분석은 분석으로 그쳤다. 폐허가 된 경복궁을 보면서 역대 권력자와 그 집단은 강병과 부국의 길을 찾지 않았다. 조선을 작살낸 일본은 책과 쌀을 구걸해 가는 무식한 소국(小國)에 불과했다. 정말 그랬을까.

神, 일본에 상륙하다
1543년 포르투갈 소총을 일본이 수입한 뒤 유럽에서는 일본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다. 국부 창출을 위해 새 무역 시장을 열려는 각국 눈이 일본으로 쏠렸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선언한 종교개혁 불길이 대륙을 휩쓸었다. 개신교에 맞서는 새 가톨릭 시장 수요가 폭증했다. 유럽 제국이 신항로로 배를 몰았다. 1534년 8월 15일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 생드니 수도원에서 가톨릭 사제 7명이 제수이트회를 창설했다. 예수회라 불리는 이 조직은 청빈과 정결, 순명(順命)과 함께 복음 전파라는 행동을 제4의 서원(誓願)으로 내걸었다. 1549년 인도에서 활동하던 창설 멤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에 상륙했다. 이듬해 하비에르는 나가사키 히라도(平戶島)에서 첫 포교를 하고 1552년 중국에서 죽었다. 히라도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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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가사키현 오무라시 모리조노(森園) 공원에는 네 소년 동상이 서 있다. 1582년 양력 2월 20일 이 바닷가에서 로마로 떠난 덴쇼유럽소년사절단(天正遣歐少年使節團)이다. 이 10대 소년들은 유럽 각국을 순례한 뒤 8년 6개월 만인 1590년 귀국했다. 이듬해 교토에 있는 대저택 주라쿠다이(聚樂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소년들과 동행한 포르투갈 사제들에게 조선과 중국 침략 계획을 알렸다. 이보다 석 달 전 같은 방에서 조선통신사 일행도 중국 침략 계획을 들었다. 일본은 세계와 상대 중이었고 조선은 그런 일본을 무시했다. /박종인 기자
전국시대 권력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교토를 방문한 예수회 루이스 프로이스 일행에게 선교의 자유를 전격 허용했다.(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1569년 4월 28일이었다. 출입항인 나가사키는 이내 '작은 로마'라고 불릴 정도로 예수회 선교사들이 몰려들었다.(노성환, '일본 나가사키현의 조선인 천주교도에 관한 연구', 일어일문학 49집)

신(神)의 강림을 허가받은 프로이스는 노부나가에게 유리 플라스크에 담긴 오돌토돌한 포르투갈 사탕 콘페이토(confeito)를 선물했다. 지금 일본인이 '콘페이토(金平糖)'라 부르는 '별사탕'이다.

1591년 3월 3일 풍신수길 저택
인도에서 온 예수회 사절단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저택을 방문했다. 교토에 있는 저택 이름은 주라쿠다이(聚樂第)다. 일본인은 가톨릭 신도를 기리시탄이라 불렀다. 기리시탄은 큰 세력으로 진화했다. 지역 영주, 다이묘(大名) 중에서도 기리시탄이 나타났다. 기리시탄 세력의 급성장에 놀란 히데요시는 1587년 7월 24일 무역과 신앙은 허용하되 선교를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렸다. 이번 사절단은 그 철회를 요청하는 사절이었다.

일본 측이 제공한 말과 가마를 타고 사절단이 주라쿠다이로 행진했다. 인도 청년이 양산을 들고 말을 몰았고 포르투갈 기수가 뒤를 따랐다. 226대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준 금빛 테두리 장식의 빌로드 외투를 걸친 20대 특별 수행단 4명도 끼어 있었다. 이들 옆에는 포르투갈어와 일본어를 통역할 사제 주앙 로드리게스도 있었다(40년 뒤 우리는 로드리게스를 다시 만나게 된다).
경남 진주성에 펄럭이는 장수 깃발.
경남 진주성에 펄럭이는 장수 깃발. 1593년 2차 진주성 전투는 사대(事大) 본국 명군의 철저한 외면 속에 치러졌다.
주라쿠다이는 기와에 금박을 둘렀고 건물 사방에는 해자가 설치돼 있었다. 더 바랄 수 없을 정도로 청결한 넓은 방에서 이들은 히데요시를 만났다.(루이스 프로이스) 의전이 오가고, 젊은 수행단이 유럽 고악기(古樂器) 클라보, 아르파, 라우데, 라베키냐를 연주하며 성가를 노래했다. 연주가 끝나고 히데요시가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매우 자랑스럽구나."

유럽으로 떠난 아이들
이들 이름은 이토(伊東) 만쇼, 지지와(チチ石) 미켈레, 하라(原) 마르티노, 나카우라(中浦) 줄리아노. 열두세 살에 유럽으로 떠나 8년 반 만에 성인이 되어 돌아온 덴쇼유럽소년사절단(天正遣歐少年使節團)이었다. 1582년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 같은 기리시탄 다이묘들이 교황 접견을 목적으로 파견한 소년들이다. 그해 2월 20일 오무라를 떠난 이들은 2년 뒤인 1584년 8월 포르투갈 리스본에 도착했다. 마카오, 믈라카, 고아를 거쳤고 리스본 이후에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펠리페 2세를 만났다. 피렌체, 로마, 베네치아, 베로나를 거치며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가끔 지지와는 엄마가 만든 주먹밥을 먹고 싶다고 울기도 했고, 하라는 천연두를 앓기도 했다. 황금의 나라 지팡구에서 온 소년들은 어딜 가든 환영을 받았다. 1585년 한 해에 유럽 전역에서 이들에 관한 서적 48권이 쏟아졌다.(김혜경, '발리냐노의 덴쇼소년사절단의 유럽 순방과 선교 영향', 선교신학 52집, 2018) 일정을 마친 이들은 구텐베르크식 활판 인쇄기와 유럽 지도와 그림을 일본으로 가져왔다.

사절단 소년들 본인은 귀국 후 불우했다. 선교는 금지됐고 기리시탄 다이묘들은 죽었다. 결국 이들은 배교했거나 처형됐다. 하지만 유럽 최강국 포르투갈, 스페인 그리고 바티칸은 이들을 통해 일본을 다시 한 번 교역 파트너로 각인했다.

조선만 몰랐던 전쟁
일본 나가사키현 히라도에 있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기념비.
일본 나가사키현 히라도에 있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기념비. 예수회 창립 멤버인 하비에르는 철포의 일본 전래 7년 뒤인 1550년 히라도에서 첫 포교를 했다.
1590년 11월 7일 예수회 사절단에 앞서 조선통신사가 똑같은 대저택 같은 방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났다. 방문 전 부사 김성일을 제외한 일행은 평복을 입었다.(김성일, '해사록·海槎錄' 행장) 3개월 뒤 예수회 사절단은 "조선 사절단이 천박하게 정강이를 드러내고 걸어 경멸당했다"고 기록했다.(프로이스, '일본사') 접견 나흘 뒤 국서가 전달됐는데 "글이 오만하고 '한걸음에 대명국(大明國)으로 들어가겠다'느니 '귀국이 앞잡이가 되어 입조(入朝)해 달라'느니 하는 말들이 있었다. 크게 놀라 의리에 의거하여 거절하였다."('해사록') 1591년 3월 25일 귀국한 정사 황윤길은 전쟁이 난다고 했고, 부사 김성일은 두려워할 것 없다고 했다.(1591년 3월 1일 '선조수정실록') 선조는 부사의 말을 취했다.

통신사들이 서울에 도착하기 전 예수회 사절단에 히데요시가 공식 서한을 전달했다. '반드시 중국 왕국을 정복하리라 결심하였다.' 중국과 조선 침공은 이미 1586년부터 예수회 사제들에게 공포했던 사안이었고, 히데요시는 그때마다 "조선과 중국을 교회의 땅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프로이스, '일본사') 조선만 몰랐다. 외면했거나.

사대가 안 지켜준 안보
1593년 6월 오사카에서 명과 일본 사이 강화협상이 벌어졌다. 명나라 사절 심유경에게 일본은 "진주성을 공격할 예정"이라고 알려줬다. 심유경은 급히 조선 주둔 명군에 진주 철수를 요청했다.(프로이스, '일본사') 승산 없는 전투에 의병장들도 참전하지 않았다. 결국 고립된 진주성에서는 직립(直立)해 있는 모든 생명이 전멸했다. 이미 개전 1년 만에 선조는 "명군이 나아가 싸울 뜻이 전혀 없으니 통탄스럽다"고 알아차렸다.(1593년 4월 6일 '선조실록') 사대(事大)는 나라를 지켜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선조는 명나라가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외쳤다. 그 손자 인조가 죽었을 때에도 실록은 '사대(事大)에 매우 근신하시어 만 굽이 물이 반드시 동으로 향해 가는 마음은 신명에게 질정할 만하셨다(事大甚謹 其萬折必東之心 可質神明也)'고 찬양했다.('인조실록' 인조대왕행장)

문명사의 충돌과 임진왜란
도도하되 막지 못할 강물이 조선에서 과격하게 만났다. 대항해의 시대, 코페르니쿠스의 과학과 군사기술과 자본이 만난 사건이 임진왜란이었다. 주력군인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는 기리시탄 부대였다. 고니시는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이 있는 기리시탄 다이묘였다. 고니시 부대 깃발은 십자가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잡았을 때 고니시는 가톨릭 교리에 따라 할복자살을 거부하고 목이 잘려 죽었다. 일본 포교사를 기록한 당시 예수회 사제루이스 프로이스는 그 전쟁을 '코라이 전쟁(Bellum Corai)'이라고 불렀다.(안재원 등, '경성제국대학도서관에 소장된 동서교류사 문헌 조사') 쇄국(鎖國) 또한 나라를 지켜주지 않았다.

하멜의 탈출과 데지마(出島)
1653년 효종 4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 스페르웨르호가 제주도에 표착했다. 하멜을 위시한 생존 선원들은 조선에 13년 동안 억류됐다. 하멜이 쓴 기록에는 1666년 탈출할 때까지 자기네가 13년 동안 한 일들이 적혀 있다. 양반집 광대짓과 땔감 베기와 잡초 뜯기와 절집 누더기와 음식 구걸. 그 강제 무급(無給) 단순 노동 13년이 억울해서 밀린 월급 받기 위해 쓴 보고서가 '하멜 표류기'다.

그때 일본 에도 정권은 조선처럼 쇄국정책을 펴고 있었다. 그런데 하멜이 13년20일 만에 도착한 나가사키에는 그믐날 별처럼 세계를 향해 날카롭게 빛나는 문이 열려 있었다. 이름은 '데지마(出島)'였다. 〈⑧성리학과 란가쿠(蘭學)에서 계속〉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2/27/20190227000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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